얼마 전 한 정부 연구원에서 인공지능 연구자를 뽑겠다며 채용 공고를 냈다. 서류 전형을 거쳐 3배수 면접 대상자가 정해졌는데, 정작 이 세 사람 중에 인공지능 전공자는 아무도 없었다. 30개 가까운 정부 산하 연구원에서 몇 년째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박사 후 연구원을 뽑았는데 전혀 상관없는 분야 전공자가 들어와서 실험 방법부터 가르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왜 이런 황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문재인 정부는 2017년 공공기관 블라인드 채용 제도를 도입했다.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과 ‘공공기관 블라인드 채용 가이드라인’ 같은 강제 수단이 과학 연구소들에도 적용됐다. 이 제도는 공공기관 채용에서 학교나 학점, 지도 교수를 쓸 수 없게 했다. 자기소개서를 비롯한 서류 어느 곳에라도 이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를 쓰면 곧바로 탈락이다. 그렇다면 능력은 무엇으로 평가할까. 과학 연구원이라면 논문 실적이 유일한 잣대가 된다. 그나마 논문의 공동 저자 이름까지 다 가려야 한다. 여럿이 함께 쓴 논문에서 입사 지원자가 어떤 기여를 했는지, 해당 분야에 어떤 비전을 갖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다 보니 채용 담당자들은 논문이 많은 순서로 걸러낸다. 한 연구소의 인사 담당 본부장은 “학력과 이력이 아니라, 채용 자체를 가려버린 정책”이라고 했다.
영국에서 학위를 받은 이주한 기초과학지원연구원 박사는 “가속기에 숙달된 물리학 박사 2명을 뽑으려고 공고를 내고 6명을 면접 봤는데, 그중 3명은 가속기에 가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다”면서 “과학기술은 능력만큼 경력과 인맥이 중요한데 이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 하버드대를 나온 사람과 서울대를 나온 사람의 경험과 인맥은 완전히 다르다. 어느 쪽이 낫다는 게 아니라 둘 다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도 교수가 노벨상을 받았다면, 다른 학생보다 월등히 높은 수준의 연구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이화학연구소, 미국 아르곤연구소 같은 세계적 연구소들은 오히려 이런 부분을 최대한 자세하게 적게 하고 지도 교수와 주변인에게 확인도 한다. 가장 확실하고 공정하게 우수한 인재를 뽑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한국 정치권의 ‘공정’은 한국 과학을 세계적 흐름과 거꾸로 내달리게 만들고 있다. 최근 한 정부 연구원에 지원했던 MIT 출신 박사는 서류 전형에서 떨어지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학력과 학점, 경력 모두 한 사람의 노력의 결과물이자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인데, 이를 적지 말라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완벽히 불공정한 일인데, 공정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고 했다.
지난 4년간 과학계가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부와 정치권에 여러 차례 건의했고, 일부 의원들이 과학계 블라인드 채용을 완화하는 법안도 발의했다. 하지만 정부와 여권은 “공정을 해칠 수 없다”는 무적의 논리로 이를 막고 있다. 한 연구원 원장은 여당 의원과 만난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꺼냈다가 “뭐가 그렇게 유별나냐”는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정작 유별난 건 누구일까. 한국노동연구원이 2019년 발간한 ‘공정 채용의 현실과 개선 방안’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해외 주요 국가 가운데 공공 부문 채용에서 지원자의 출신 학교·전공·학점이 드러나는 것을 원천적으로 금지한 사례는 거의 없다. 이 정부에도 과학계 출신 인사들이 수두룩하다. 국회의원과 청와대 보좌관, 차관을 거쳐 산하 기관장을 하는 사람도 있고 현직 차관도 있다. 그들이 이런 문제를 모를 리가 없다. 어느 게 진짜 공정한지 명확하게 알면서 입을 다물고 있으니, 더 이상 한심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