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용산구 노들섬 다목적홀에서 열린 2050 탄소중립위원회 제2차 전체회의에 참석하고 있다./뉴시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천연가스가 묻혀 있는 나라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따르면, 러시아의 천연가스 매장량은 지난해 기준 390억톤으로 전 세계의 24%를 차지한다. 그런 러시아가 천연가스를 무기로 휘두르자 유럽 국가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행보를 둘러싸고 미국·유럽과 갈등을 빚고 있는 러시아가 유럽으로 가는 천연가스 공급관 중 하나를 틀어막자 유럽 지역 천연가스 가격은 지난해 초 대비 4배 수준으로 치솟았다. 유럽연합(EU)은 천연가스의 40%를 러시아에서 들여온다. 인구 400만명의 동유럽 국가 몰도바는 지난 20일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이 천연가스 대금 연체를 이유로 몰도바에 가스 공급 중단을 통보한 데 따른 것이다. 러시아는 옛 소비에트 연방에 속했던 몰도바가 EU와 관계를 강화하자 천연가스를 앞세워 압박하고 있다. 지난해 9월 몰도바와 체결한 천연가스 장기 공급 계약이 끝나자 공급 가격을 2배 이상 올리고 공급량을 3분의 1로 줄였다.

이런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는 그저 국제 이슈로 넘겨버릴 일이 아니다.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심각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정부가 지난해 10월 국무회의에서 통과시킨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보면 2050년 국내 전력 수급 계획에 ‘동북아 그리드(grid·전력망)’가 포함됐다. 중국·러시아산 전기를 들여오겠다는 것으로, 이를 통해 2050년 33.1TWh(테라와트시) 전력을 확보하겠다는 안(案)이 시나리오에 들어 있다. 1.4GW급 신형 원전 3~4기가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원전이 줄어드는 대신 2050년 국내 전력 수요의 60~70%를 책임질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는 날씨에 따라 전력 생산이 들쑥날쑥하다. 재생에너지가 갖고 있는 변동성의 한계를 전기 수입으로 보완한다는 게 정부 구상이다.

하지만 이번에 봤듯이 러시아는 언제든 에너지를 무기화할 수 있다. 러시아는 2005년 말 우크라이나에 공급하던 가스 가격을 단번에 4배가량 올린다고 선언했다. 우크라이나가 거부하자 이듬해 1월 1일 가스 공급을 전격 중단했다. 2009년 1월에도 2주간 우크라이나에 천연가스 공급을 끊었다. 중국도 정치·외교 리스크가 크기는 마찬가지다. 중국은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보복으로 우리 유통·자동차·관광 등 산업에 큰 타격을 입힌 바 있다. 같은 일이 전력 분야에서 재연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지난해 중국은 미국의 반중 전선에 동참하는 호주를 길들이기 위해 호주산 석탄 수입을 중단했다가 발전 연료 부족으로 전력난에 시달렸다. 전기를 다른 나라에 팔기는커녕 사와야 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전기가 많이 필요한 여름철이나 겨울철에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 역시 전력 수요가 크다. 우리가 원할 때 필요한 만큼의 전기를 중국으로부터 들여오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다. 송전망이 북한을 통과해 차질 없이 운영될 수 있을지는 중국·러시아에서 전기를 구하는 것과 다른 차원의 문제다.

동북아 역학 관계에서는 예기치 않게 중국·러시아와 갈등이 생길 수 있다. 그럴 때 중국·러시아에 연결된 전력망은 볼모가 될 수밖에 없다. 수출길이 막히는 것과는 다른 수준의 위기 상황이 올 수 있다. 한순간이라도 전력 공급이 수요를 맞추지 못해 정전 사태가 발생하면 경제·사회가 마비되기 때문이다. 안정적 전력 공급원인 원전을 유지할 경우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미국·유럽이 원전에 주목하는 것도 에너지 안보를 고려해서다. 탈원전 이념 속에 에너지 안보가 내팽개쳐진 지난 5년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