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는 결과적으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를 도와준 셈이 됐다. 그는 얼마 전부터 수도권 전철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장연 출퇴근 시간대 탑승 시위에 대해 “시민을 볼모로 하는 불법 투쟁”이라며 집중 비판했다. 왜 저러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러자 소셜미디어에서 찬반 논란이 폭발했다. 시각장애인인 자기 당 국회의원은 이 대표를 대신해 사과를 하러 갔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까지 나서 사안을 점검했다. 이 대표가 이번 주 페이스북에 올린 관련 비판 글만 19개다. 다른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이 정도로 많이 올린 적이 없었다. 전장연이 바란 게 사실 이런 사회적 관심이었는데 이 대표 ‘덕분에’ 부각됐다.

논의는 활발해졌지만 부정적 반응이 적지 않다. 여러 번 현장 취재를 나간 동료 말에 따르면 “이해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불편을 끼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평소 소수자 인권 문제에 우호적으로 얘기했던 한 변호사 지인도 “그리 현명한 걸로 보이지 않는다”면서 “시민들 지지를 얻어야 하는 상황에서 절박함을 알리려다 오히려 반감을 산다”고 지적했다.

전장연이라고 이런 분위기를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할 말이 있다. “조용하게 거리 구석에서 하면 누가 신경 쓰나요. 이렇게 난리를 쳐야 주목하고 책임자들이 움직이거든요.”

박경석 전장연 공동대표와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

이런 지하철 탑승 시위는 가까이는 지난해 12월, 멀게는 20여 년 전부터 있었다. 이 대표 소속당 청년 보좌역이 “(서울)시장과 정권이 바뀌자마자 시작된 시위”라고 공격했지만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장애인들은 그동안 온갖 불편과 설움을 견디며 지난한 세월을 버텨왔다. 그들도 비장애인처럼 어디든 맘대로 가고 싶지만 현실은 간단치 않다. 서울시 장애인 규모는 40만명. 전체 인구 4%를 넘는다. 서울시 관계자는 “장애인들은 한번 이동하려면 너무 힘들어 집 밖으로 잘 나가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 거리에선 저 비율(4%라는 인구)을 체감하기 어렵다”고 했다.

장애인용 저상버스는 전체 버스 4대 중 1대, 장애인 콜택시는 1시간은 기본으로 기다려야 잡을 수 있다. 그나마 그동안 지하철역 엘리베이터가 대폭 늘고, 휠체어가 편히 갈 수 있게 문턱을 없애고 장애인용 경사로를 만드는 무장애(Barrier Free) 시설이 많아진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런 과격한 시위가 정책 당국 관심을 끌고 그 뒤 개선이 이뤄진 부분이 분명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은 어쩌면 부메랑이 될 수도 있는 이런 시위 방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이들 처지를 자기 일처럼 공감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란 그리 쉬운 덕목이 아니다. 자기가 타야할 지하철이 늦으면 못 참고 화를 내면서 평생 가고 싶은 곳에 갈 엄두도 내기 어려운 장애인들이 억지 좀 쓴다고 “왜 (시민들에게)피해를 주느냐”고 역정을 내는 장면을 바라보자면 심경이 복잡해진다. 이번 지하철 시위 도중 가사 도우미 일을 하는 여성이 “당신들 때문에 늦어서 잘리면 책임질 거냐”면서 거칠게 항의하는 일도 있었는데 비슷한 사회적 약자(弱者)들끼리 옥신각신하는 모양새가 만들어진 건 씁쓸하다.

그렇다고 지하철을 이용하는 비장애인들에게 인내를 요구하고 역지사지 덕성을 발휘해달라고 매번 호소할 수는 없다. 공(功)은 정책 당국 몫이다. 정부가 책임지고 풀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앞으로 집권 정부를 꾸릴 정당의 대표가 이번 시위를 인질극에 비교하며 여론몰이를 하는 건 사태를 꼬이게 할 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력 정치인이 특정 집단을 공격했을 때 그 동조(同調) 효과가 얼마나 비이성적으로 흐르고 사회를 혼돈으로 몰아가는지 미국을 비롯해 여러 외국 사례를 통해 많이 봐왔다.

이 대표가 전장연을 비판하자 장애인 이동권 문제가 정치 진영 논리와 얽혀 난장판으로 변질되고 있는 부분은 그래서 아쉽다. 이런 식으로라면 양패구상(兩敗俱傷), 양쪽이 다 함께 패하고 상처를 입을 뿐이다. 인수위가 이걸 해결(解決)하겠다고 나선 점은 고무적이다. 결(決)은 물꼬를 튼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누가 장애인이 되더라도 다른 구성원들과 동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 구조를 만드는 과정에 여야(與野)가 따로 있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