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인데 유럽은 벌써 겨울 걱정이다. 유럽의 천연가스 창고가 비어가며 올겨울 심각한 에너지 위기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천연가스 주요 수입국인 한·중·일 동북아 지역의 겨울 기온이 유럽의 에너지난을 좌우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같은 유럽 국가이지만 프랑스와 독일이 위기를 느끼는 온도 차는 다르다. 프랑스는 올겨울 독일이 난방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면 가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경쟁 관계인 프랑스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은 독일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만한 일이다.
두 나라의 이런 차이는 탈원전 정책이 갈랐다. 프랑스는 전 세계에서 원전 의존도가 높은 나라 중 하나다. 부족한 화석연료 자원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 주도로 원전 기술 자립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프랑스의 전력 생산에서 원자력 비율은 70.6%로 우리나라(29.6%), 러시아(20.6%), 미국(19.7%)에 비해 훨씬 높다. 덕분에 에너지 자급률이 안정적인 50%대를 유지해 왔다. 이런 프랑스도 올랑드 전 대통령 재임 때 원전 비율을 낮추는 탈원전과 재생에너지 확대를 추진했다. 하지만 마크롱 정부가 들어선 뒤엔 앞선 정부의 친환경 에너지 전환이라는 정책 기조는 유지하면서 원전에 대해서는 실용주의 접근을 했다. 원전과 재생에너지 사이 양자택일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실용적 노선을 택한 것이다. 원자력 에너지를 친환경 에너지 전환의 교두보로 삼겠다는 비전을 제시한 마크롱 정부는 지난 2월 6기 신규 원전 건설을 발표했다. 8기 추가 건설 방안도 검토하겠다고 했다. 또 기존 원자로 폐쇄 계획을 중단하고, 수명을 늘려 계속 쓰겠다고도 했다.
반면 메르켈 정부 시절이던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탈원전을 추진한 독일은 오는 12월까지 마지막 남은 원전 3기를 폐쇄할 계획이다. 2010년 독일 전력 생산량의 22%를 차지했던 원전은 작년 11.8%, 올 1분기 6%로 떨어졌고 계획대로라면 내년이면 영(0)이 된다. 지난해 프랑스 전체 에너지 소비 중 화석연료(오일·가스·석탄)와 원전 비율은 49.9%와 36.5%인데 반해 독일은 76%와 4.9%이다. 독일은 절대적으로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푸틴의 값싼 가스만 믿고 탈원전·탈석탄을 추진한 독일은 러시아·독일의 수십년 경제 밀월이 한순간 깨지면서 심각한 에너지 위기에 봉착했다. 러시아 가스 공급 감축에 대응하기 위해 폐지가 결정된 석탄발전소를 일시 재가동하고, 수명을 연장하는 비상대책을 마련했다. 하지만 폭염과 가뭄으로 독일 내륙 수운의 대동맥인 라인강 수위가 뚝 떨어지면서 석탄발전소 전력 생산은 차질을 빚고 있다. 기차에 승객보다 석탄을 먼저 싣는 방안까지 추진 중이다. 독일 시민은 가스 대신 난로를 사용하기 위해 나무·석탄 땔감을 사서 쌓아 놓는 지경이다. 그제야 독일 정부는 “러시아 에너지에 의존했던 정책은 실수였다”며 원전 폐쇄 연기를 시사했다. 하지만 탈원전 10년이 넘은 독일은 기존 설비 재가동을 위한 개·보수에 막대한 비용이 필요해 탈원전 정책 폐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노르웨이·호주 등 주요 에너지 생산국이 자원 수출을 제한할 태세여서 우리나라도 에너지 안보 전략 강화가 더욱 절실한 상황이다. 에너지 공급망 다변화와 안정적인 공급처 확보를 위한 장기 대책이 시급하다. 무엇보다 원전을 늘리든 재생에너지를 확대하든 단기간 성과를 낼 수 없는 에너지 정책은 경제·과학적 근거는 물론 안보 측면까지 고려해 추진돼야 한다. 정치·이념적 판단이 끼어들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