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이 공사중이던 1961년 8월 15일 국경을 지키던 동독 초병콘라트 슈만이 철조망을 뛰어넘어 서베를린으로 넘어오는 장면. 독일 사진가 페터 라이빙이 찍어 AP를 통해 전세계로 타전됐다./위키피디아

1961년 8월 13일, 동·서독을 가르는 베를린 장벽이 설치됐다. 자유를 찾아 장벽을 너머로 탈출하려다 사살당하거나 지뢰 폭발로 목숨을 잃은 동독 주민이 속출했다.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1월 9일까지 총 186명이나 됐다. 장벽이 등장하고 석 달 뒤, 서독 정부는 니더작센주 소도시 잘츠기터(Salzgitter)에 동독 정권이 자행한 인권침해 사실을 수집해 보존하는 범죄 기록소를 세웠다. 통독 후 가해자를 처벌할 증거로 삼겠다는 뜻이었다. 30년 가까이 축적한 자료 4만1390건이 이후 동독 경찰과 사법 기관, ‘슈타지’라 부른 비밀 경찰과 부역자 등 8만여 명 형사 소추와 피해자 보상 과정에서 근거로 활용됐다.

잘츠기터 범죄 기록소 설립을 강력히 주창한 사람은 빌리 브란트(1913~1992)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었다. 그는 나중에 총리가 돼 동독과 교류·협력을 중시하는 동방 정책(Ostpolitik)을 추진하며 통일의 기틀을 닦았지만, 장벽 희생자가 잇따르자 “천인공노할 동독 만행에 대해 항의만으로 끝낼 순 없다”며 국민을 설득했다. 동독 정권과 이들의 충견(忠犬)에게 그들의 악행을 차곡차곡 수집하는 범죄 기록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동독 정치 지도자들은 “주권 간섭”이라며 폐지를 요구했고, 서독의 친(親)동독 인사들도 “해체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서독 정부는 “인권이 최우선 가치”라며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잘츠기터 중앙범죄기록소/위키피디아

우리나라에선 민주당 반대로 10년 넘게 표류하던 북한인권법이 2016년 국회를 통과하며 법무부에 북한인권기록보존소가 설치됐다. 그해 10월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출범식에는 법무부 장관과 인권국장, 통일부 차관, 외교부 북한인권국제협력 대사 등이 참석했다. 당시 법무부는 “북한 주민의 인권 상황 개선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자료 보존과 분석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인권 변호사’ 출신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2018년 북한인권기록보존소는 법무연수원 용인 분원으로 쫓겨났다. 최근에는 관련 예산이 10분의 1로 쪼그라든 사실이 드러났다. 통일부가 넘겨주는 북한 인권침해 자료는 2019년 700건에서 올 상반기 18건으로 급감했다. 4명이던 파견 검사는 점점 줄더니 한 명도 남지 않았다. 이런 소식을 전해 들은 독일 범죄 기록소 관계자는 “형사 소추 자료로 쓰이는 기록을 담당하는 검사가 전혀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라며 혀를 찼다고 한다. ‘남북 이벤트’에 골몰하던 문재인 정부의 통일부 장관은 “기록이 실제인지 일방적인 (탈북자) 증언인지 확인과 검증이 부족하다”는 발언으로, 목숨 걸고 북한 참상을 증언한 탈북자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그 빈자리를 비정부기구(NGO)인 사단법인 북한인권정보센터가 마련한 북한인권기록보존소가 채우고 있다. 15년간 북한 인권 피해 사건 8만2271건과 관련 인물 5만2062명을 기록하고 분석했다. 소장을 맡고 있는 최기식 변호사(법무 법인 산지)는 “잘츠기터 범죄 기록소는 그 존재만으로 동독 법 집행자들의 악행을 제어하는 예방적 효과를 거뒀다”며 “북한의 인권침해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고 뭉개는 것은 결과적으로 방조하는 것”이라고 했다. 북한을 품고 통일의 미래로 함께 나아가야 하지만, 북한 동포들이 당한 인권침해 참상을 정확히 기록하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이렇게 한 장씩 모은 ‘기억과 증언의 벽돌’로 북한 정권의 반(反)인권성을 단죄할 ‘정의의 심판대’를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