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오늘도 허공에 망치질을 한다. ‘해머링 맨(Hammering Man)’은 서울 광화문 근처에 있는 22m 높이의 움직이는 조각품이다. 요즘엔 산타클로스 모자와 양말을 착용하고 있어 멀리서도 눈길을 붙잡는다. 해머링 맨이 망치를 머리 위로 올렸다가 내리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재보니 55초다. 이 동작을 하루 10시간씩 반복한다. 설치된 지 올해로 20년. 그 세월은 약 500만번의 망치질과 같다.
해머링 맨은 구두 수선공부터 과학자, 광부, 회사원, 예술가까지 ‘일하는 사람’의 상징이다. 우리는 어떤 장소에서 각자의 망치를 들고 일한다.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고 적당한 대가를 받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해머링 맨이 어느 날에는 활기차 보이고 어느 날엔 지쳐 보인다. 아마도 일터에서 느낀 감정, 일을 바라보는 마음 상태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일 앞에서 때로는 숙연해지고 때론 서럽다.
오래 일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연구 대상이다. 이순재, 신구, 박정자, 손숙 등 ‘대학로 방탄노년단’은 데뷔한 지 60년이 넘었다. 더 이상 경제적 목적으로 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관객이 안심하고 선택하게 하는 이름이고,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저울 같은 캐릭터 분석이 강점이다. ‘노병(老兵)은 죽지 않는다’를 흥행으로 증명하고 있다.
현역 최고령 배우 이순재는 살아 있는 해머링 맨이다. 1956년부터 연기라는 망치질을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연극 ‘갈매기’ 연출에 도전하면서 배우로도 출연한다. 진력나지 않을까? 왜 아직도 연기를 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이것밖에 할 게 없으니까 하는 거예요. 그리고 아직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니까 합니다.” 단순하고 명쾌한 그 대답이 가슴을 쿵 쳤다.
배우는 몸 전체가 망치다. 연기란 자기 몸뚱이를 가지고 자기 능력껏 표현하는 일이다. 모든 것을 다 드러내고 평가받는 직종. 눈치 보지 말고 두 발 다 담가야 한다. 그러나 히트작을 내고 인기를 얻을 땐 조심해야 한다. 그 이미지는 감옥이라 갇히면 끝장이다. 이순재는 성공한 캐릭터인 ‘대발이 아버지’를 5~6년 더 우려먹을 수 있었지만 끝나자마자 버렸다. 백지(白紙)에서 다시 시작했다.
망치질에 마일리지가 있다면 백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VVIP다. 1920년생인데 여전히 강연을 하고 책을 쓴다. 김 교수는 “여든 살이 될 때 좀 쉬어 봤는데 노는 게 더 힘들더라”며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일이 인생이에요. 남들은 늙어서도 그렇게 바쁜데 행복하냐고 묻습니다. 그들이 생각 못 하는 행복이 뭔고 하니, 내 일 덕분에 무엇인가 받아들인 타인이 행복해하는 걸 보게 됩니다. 그게 내 행복이에요.”
오래 일하면서 행복한 비결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생활이 되고 남에게 도움이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사람은 크게 세 부류라고 이순재는 말했다. 꼭 있어야 할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 한국 사회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할 수 있는 게 연기뿐인데 아직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기에 오늘도 연습실로 간다.
일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내 쓸모만이 아니고 타인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일한다고 관점을 바꾸면 출근길이 즐거울 수 있다. 구순이 코앞인 현역 배우와 백세 철학자가 말하는 ‘망치질의 철학’은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환승(갈아타기)이 각광받는 시대라서 더 웅숭깊다. 필요한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며 이 사회를 지탱하는 해머링 맨들을 향한 응원가로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