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 미 안보보좌관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중 수교 물꼬를 튼 것은 1971년 일이다. 미국은 중국이 서방 체제에 편입될 것이라는 기대로 경제 발전을 적극 지원했다. 하지만 중국은 국제 질서 수용이나 정치적 자유 확대와 반대 방향으로 내달렸고, 미국의 패권과 세계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중국의 실체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키신저의 실수’라는 주장도 나오지만, 결과론적인 얘기일 뿐이다. 당시 미국이 중국을 키워주지 않았다면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소련 붕괴와 냉전 체제 종식이 한참 뒤로 밀렸을 수도 있다.
50년이 지나 미국은 다시 ‘키신저 질서’를 대체할 새로운 안보 틀을 짜고 있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을 끌어들였다면, 지금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적극 당기고 있다. 2차 대전 후 일본을 무장해제하고 ‘전쟁 할 수 없는 나라’ 족쇄를 채운 게 미국이다. 그랬던 미국이 이제 일본의 ‘군사 대국화’를 가장 열심히 후원하고 있다. 일본이 ‘반격 능력’ 보유와 방위비 2배 증액 등을 명기한 안보 문서 개정을 의결한 지난 16일 미 백악관 안보보좌관, 국무장관, 국방장관, 상원 외교위, 하원 외교위가 앞다퉈 환영 성명을 냈다. “역사적 안보 도약” “필수 불가결한 파트너” 같은 수사를 썼다. 미 외교 안보 라인이 총출동한 이런 격렬한 환영은 거의 본 적이 없다.
몇 년, 몇 십 년 후에 세상이 또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다만 하나 분명한 것은 바로 지금이 국제 안보 질서에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대격변기라는 것이다. 합종연횡이 숨 가쁘게 이뤄지고 있다. 한국 같은 ‘낀’ 국가는 자강(自强)과 함께 연대, 즉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함께할지에 생존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중국·러시아·이란 등과 사안별로 협력은 할 수 있어도 운명을 같이하는 건 상상할 수 없다. 우리의 선택은 사실상 정해져 있다. 미국·일본을 비롯한 영국·프랑스·호주 등 가치 공유국(like-minded states)과 팀을 이루는 것이다.
일본의 안보 문서 의결 후 국내에서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유사시 한반도 개입 우려에 모든 초점이 맞춰졌다.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를 가장 직접적으로 겪은 우리가 이 부분에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다. 일본의 역사 인식도 명확지 않다. 다만 이는 36쪽 안보 문서 중 일부분이다. 중국·북한 위협에 대한 인식, 한·미·일 협력·공조 강화, 자유민주주의와 인권·법치 수호 등 큰 틀은 우리의 지향점과 다르지 않다.
일본이 당장 한반도에 진군할 것처럼 과장하며 배척하기보다는, 한·미·일 협력 체제 속에서 소통을 강화하고 우리 발언권을 늘리는 게 훨씬 현실적인 해법일 것이다. 만약 일본이 불순한 야욕을 갖고 있다면 미국이라는 지렛대를 활용해 좌절시킬 수 있다. 만일을 대비한 군사작전 역할 분담 체계도 구축할 수 있다.
현실을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은 쉽고 당장 국내 정치에서 인기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우리가 제외된 틀이 짜이고 질서가 형성된다. 미적거리다 참여 적기를 놓친 쿼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이라는 반면교사도 있다. 당파 이익을 위해 대안 없이 목소리만 높이는 포퓰리즘에 흔들리지 말고 오로지 국익을 잣대로 큰 흐름을 읽는 차가운 머리가 필요하다. ‘서울 과녁’ 운운하며 핵 탑재가 가능한 미사일을 올해만 67발을 쏜 북한, 이런 북한의 뒤를 봐주며 한국의 방어 무기에도 내정간섭을 하고 서울에 비밀경찰까지 둔 중국…. 이들과 일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당면한 위협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