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에서 가장 많이 쓰는 기호로 꼽히는 시그마(Sigma)와 델타(Delta), 그리고 기술(Technology)의 머리글자를 합해 ‘SDT’로 이름을 내건 스타트업이 있다. 2017년 당시 27세 청년이 창업해 6년 만에 국내 손꼽히는 양자(量子·quantum) 기술 회사로 자리 잡았다. 이 회사 창업자 윤지원 대표는 초등학교 졸업 후 혼자 미국에서 유학한 조기 유학파다. MIT(매사추세츠공대) 물리학과에 입학해 양자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이 학교 석사와 하버드·MIT 공동 연구소를 거쳐 2014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양자정보연구단에 합류했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지난해 6월 9일 오후 대전광역시 유성구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문종철 책임연구원으로부터 양자시뮬레이터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뉴스1

3년 후 MIT로 돌아가 박사 과정을 밟으려던 그가 미국에 비하면 양자기술 불모지와 다름없는 한국에서 창업하기로 결심했다. ‘교수’의 꿈을 접고 ‘메기’가 되기로 마음을 바꾼 것이다. 고담준론(高談峻論)하는 학계에 자극을 주려면 스스로 과학자 물기부터 빼야 했다. 퀴퀴한 냄새 나는 지하 공간을 관리하는 ‘스마트 맨홀’ 개발부터 나섰다. 맨홀 아래 온도·습도·이산화탄소 농도 감지와 사물인터넷 기술을 연계해 광범위한 공간의 침수·화재, 질식 사고 등을 예방하는 시스템이다. 이어 양자 센서, 양자 통신 장비 개발로 영역을 확대했다. 양자 난수로 해킹을 막는 IP카메라(인터넷에 연결하는 실시간 영상 카메라)도 개발해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

양자 컴퓨터·양자 센서·양자 통신 등 양자기술의 3대 산업 분야를 15년간 두루 연구하고 사업한 그의 경험은 학계와 업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고 있다. 기술만 개발되면 다 된 것으로 여기는 우리 풍토에 “기술은 전체의 5% 비중에 불과하다”며 “실제로 팔기 위해서는 품질 검증, 인증, 마케팅 등 어마하게 지루해 보이는 모든 과정에 공들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식이다.

윤지원 SDT 대표가 안전모를 살펴보고 있다. 윤 대표는 "양자기술은 제조업의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장련성 기자

정부가 작년 말 최고위급 협의 채널로 마련한 ‘양자기술 최고위 전략대화’에선 최연소 인사로 참석해 ‘메기효과’를 톡톡히 냈다. 이 자리에서 정부는 2030년대 초 양자컴퓨터 시연과 양자암호통신기술 전국망 확대, 양자 분야 고급 인력 1000명 확보 등을 목표로 내세웠다. 여기에 윤 대표가 “2030년이 아니라 내년부터 당장 돈 번다는 각오로 나서야 한다”며 문제 제기를 했다. 그는 “몇 년까지 무엇을 개발한다는 식의 1차원적 목표가 통하는 시대는 끝났다”며 “단순히 숫자를 내세우는 것보다는 우리 목표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차원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철학과 고민이 선행돼야 한다”고 했다.

양자기술은 국방 분야의 통신 보안은 물론이고 제조업의 정밀 계측과 공정 효율화, 신약 개발과 교통망 최적화 등 다양한 산업의 게임체인저로 부각되고 있다. 다만 우리나라 양자기술은 최선도국 대비 77%(양자컴퓨터), 85%(양자통신), 86%(양자센서) 수준이고 특허 경쟁력도 87% 수준에 그쳐 미국·중국·일본·유럽 등에 뒤처져 있다.

올해 우리 정부가 역대 최대인 984억원을 양자기술 분야에 투자하기로 결정한 배경이다. 하지만 최근 4년간 약 3조5000억원을 투자한 미국과 같은 구도로 경쟁하겠다는 접근은 한계가 있다. 기술 수준이 선진국에 많이 뒤지지 않는 양자센서·통신에 투자를 집중하고, 양자컴퓨터 분야는 기반 장비를 제조해 미국에 파는 발상의 전환도 염두에 둬야 하는 이유다.

윤석열 대통령이 오는 19일 순방 마지막 일정으로 취리히 연방공대를 방문한다. “스위스가 양자 기술 강국이 될 수 있었던 성공 요인과, 후발 주자인 우리나라가 취해야 할 전략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 위한 자리”라고 한다. 이는 ‘퀀텀 점프(비약적 도약)’를 꿈꾸는 국내 메기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노력으로 이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