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를 판단할 때 한국 관련성은 언제나 중요한 잣대지만, 지나치게 매몰되면 ‘자국 중심주의’에 빠질 우려도 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작 발표를 둘러싼 일부 반응들이 그랬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이 오는 3월 열리는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작 최종 명단에서 빠지자 온·오프라인에서 극심한 반발이 있었다. 지난해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과 청룡영화상 6관왕 등 국내외에서 낭보(朗報)가 잇따를 때마다 기사를 작성했기에 개인적으로도 아쉬움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에만 빠지면 자칫 세계 영화계의 흐름을 놓칠 수 있다. 올해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작 가운데 벨기에 영화 ‘클로즈’와 폴란드의 ‘이오(EO)’는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도 박 감독의 영화와 나란히 경쟁 부문에 올랐던 수작들이다. 당시 두 영화도 심사위원대상과 심사위원상을 각각 받았다. 특히 ‘EO’를 연출한 예지 소콜리모포스키(84) 감독은 지난해 칸 시상식에서 무대로 올라왔을 때 관객들이 기립 박수로 존경심을 표했던 노장이다. 우리가 자국 영화 탈락에만 격분하거나 매몰되면, 의도와 관계없이 해외 거장들의 예술적 성취를 도외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또한 2020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2021년 배우 윤여정씨의 연속 수상 덕분에 우리가 행복한 ‘착시 현상’에 빠져 있을 뿐, 본래 아카데미 시상식은 미 영화계의 ‘안방 잔치’다. 당장 ‘기생충’이 90여 년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으로 최고상인 작품상을 받은 비(非)영어 작품이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봉 감독이 ‘기생충’으로 4관왕에 오르기 전에 미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오스카(아카데미 시상식)는 국제 영화제가 아니다. 매우 지역적(로컬) 영화제”다.
‘헤어질 결심’의 후보 탈락에도 불구하고 올해 시상식에서도 ‘아시아 강세’는 두드러진 현상이다. 올해 돌풍의 주인공은 1980년대 홍콩 영화 스타였던 배우 양쯔충(楊紫瓊·60)이다. 지난달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수상에 이어서 아카데미에서도 같은 부문 후보에 올라 있다. 올해는 양쯔충을 포함해 아카데미 역사상 가장 많은 아시아계 배우들이 연기 부문 후보에 오른 해이기도 하다.
1980년대 ‘예스 마담’ 시리즈의 호쾌한 액션을 기억하는 홍콩 영화 팬들이라면 상전벽해(桑田碧海)로 느낄 법한 사건이다. 과거 우리의 영화적 상상력이 한·중·일(韓中日)과 대만, 홍콩이라는 동아시아의 반경에 머물렀다면, 지금은 전 세계 영화계가 실시간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방증이다. “여기 오기까지 40년이 걸렸다. 결코 손에서 놓지 않겠다”는 양쯔충의 골든글로브 수상 소감은 봉 감독의 ‘1인치 장벽’이라는 비유만큼이나 의미 있다.
한국 수상 여부에만 목매는 건 과거 우리가 세계 무대에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시절의 관행이다. 적어도 경제와 문화 영역에서만큼은 그런 인식과 ‘헤어질 결심’을 할 때가 됐다. 해외 공장의 생산품들이 한국 기업의 브랜드를 달고서 다시 세계로 나가는 것처럼 드라마·영화·대중음악 분야에서도 해외와 한국의 영역은 더 이상 손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한국 아이돌 그룹이 북유럽 작곡가들의 노래를 불러서 히트시키고, 한국 드라마·영화에 일본 감독과 중국 배우가 참여하는 것도 이미 일상적 풍경이다. 중국 출신의 배우 탕웨이가 주연을 맡은 ‘헤어질 결심’이 대표적인 경우다. 무턱대고 ‘K’를 갖다붙이거나 ‘국뽕’이라고 비난하는 자기 도취와 자기 비하 모두 이제는 촌스럽다. 우리의 민족주의 정서도 한층 업그레이드시킬 시점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