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불거졌던 대한항공 마일리지 논란은 회사 측이 개편 작업을 무기한 연기하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사태의 전개 과정을 보면서 뒷맛이 개운치 않다.
이번 논란은 마일리지 제도 개편으로 불이익을 받게 될 고객들이 불만을 제기하고, 언론이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시작됐다. 파문이 커지자, 대한항공 측은 “미국 뉴욕 등 장거리 노선 이용자에겐 불리해졌지만, 일본·중국 등 단거리 노선 고객은 오히려 혜택이 늘어난다”며 해명에 나섰다.
이렇게 어떤 상품이나 서비스와 관련해 고객과 회사 간에 공방이 벌어지고, 언론이 취재·보도로 이를 공론화하면서 나름의 접점을 찾아가는 과정은 흔히 있는 일이다. 대한항공도 마일리지 좌석을 늘리는 등 고객 불만에 대응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똑똑한 소비자들은 다른 외국 항공사들의 마일리지와 항공권 가격을 비교해 보고, 나름대로 합리적 선택을 하면 된다.
그런데 그 와중에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느닷없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대한항공은 가르치려는 자세가 근본부터 틀렸다. 눈물의 프로모션은 못할 망정”이라고 원색적으로 비판하고 나서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장관 지적 며칠 만에 대한항공은 마일리지 제도 개편 작업을 중단하겠다고 백기를 들었다. 항공 운수권 배분이나 사고 조사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가진 주무 부처 장관의 호통 앞에 대한항공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원 장관의 시원한 발언은 당장은 소비자들로부터 박수받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격·품질을 두고 소비자와 기업이 비교 선택하고 경쟁하며 균형을 찾아가는 ‘시장의 기능’을 외면한 채, 정부가 갑자기 등장해 특정 기업을 향해 옐로카드를 꺼내든 것을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을까? 이제 대한항공은 새 마일리지 제도를 만들면 발표 전에 국토교통부에 보고하고 장관의 ‘OK 사인’부터 받아야 할 것같다. 아니면 또 어떤 소리를 듣게 될지 모른다. 기업이 마일리지 마케팅 전략까지 정부의 승인을 받는 상황이 된 것이다. 만약 대한항공의 독점적 지위로 불공정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면, 정부는 말로 호통을 칠 것이 아니라, 정해진 절차에 따라 들여다보면 된다.
이뿐 아니라 최근 정부와 정치권의 기업에 대한 간섭은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고 있다. KT 대표이사(CEO) 선임도 그렇다. KT 이사회가 구현모 대표를 차기 CEO 최종 후보로 확정한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반대 의사를 밝히고, 대통령이 한마디 하자 기존 선임 절차는 한순간 없던 일이 돼 버렸다. 이후 유력 인사의 낙점설까지 돌았다. 대통령의 말대로 “스튜어드십(기관 투자자의 의결권 행사)이 작동돼야 한다”면, 그건 주총에서 표 대결로 검증받으면 될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후임 CEO로 선임되든, 정치권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또 과기정통부 차관이 통신비를 두고 “사전 담합이 아닐지라도, 담합이 형성되는 분위기가 없었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일도 있었다. 담합의 증거는 없지만, ‘네 죄는 네가 알 터이니 반성부터 하라’는 경고다.
정책적 성과를 보여주고 싶은 정부는 늘 ‘관치의 유혹’에 노출돼 있다. 하지만 스스로 자제할 필요가 있다. 약탈적 담합이 없는지, 정보 불균형으로 소비자 피해가 없는지 감시·추적해 시장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에 그쳐야 한다. 대신 경제 주체들이 자유롭게 경쟁하며 활동할 수 있도록 법 집행은 엄정하게 해야 한다. 원희룡 장관이 건설노조의 불법행위에 엄격하게 대응하는 것처럼 말이다. 성과는 더디게 나올 수 있지만, 부작용은 적다. 더구나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운 보수 정부라면 더더욱 ‘절제의 미덕’을 보여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