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기생이 된 장해당은 갑부 마원외와 진심으로 사랑해 첩으로 들어가 아들을 낳는다. 이를 눈엣가시로 여긴 본처 마부인은 불륜남과 작당해 남편을 독살하고 장해당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 상속 재산을 노린 마부인은 한술 더 뜬다. 장해당의 아들을 자기 아들이라 주장하며 동네 이웃들까지 매수해 거짓 증언을 하게 한다. 장해당은 억울하다.
1200년대 중국에서 쓰인 ‘회란기(灰闌記)’는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이야기다. 극공작소 마방진이 지난해 봄 200석 소극장에서 초연했고 연말에 한국 연극 베스트 7으로 선정됐다. 관객 평점은 10점 만점에 9.5점. “다시 보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하자 올봄에는 600석 중극장으로 규모를 키웠다.
고전은 해석하는 자의 몫이다. 연출가 고선웅은 산파와 법관까지 매수해 자기 자식이라고 우기는 황당한 이야기가 우리 현실과 통한다고 생각했다. 아동 학대가 빈발하고 인정할 수 없는 판결이 적지 않다. 중한 범죄는 가벼이 처분되고 가벼운 범죄는 무겁게 다뤄진다. 돈이 있으면 무죄가 되고 힘이 있으면 그물 사이로 잘도 빠져나간다. 관객은 장해당이 매를 맞을 땐 마음이 아프고 죄인들이 칼을 찰 땐 기뻐한다.
우리는 왜 권선징악에 열광하나. 오만과 독선, 불공정에 진저리가 나기 때문이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는 공허한 구호에 그쳤다. 조국 전 법무장관 부부의 표창장 위조나 인턴 경력 창작은 부모이기에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들의 학폭에 대해 피해자를 탓하고 전학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소송한 게 드러나 국가수사본부장에서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도 파렴치하다.
100만명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장바구니에 담던 10여 년 전에는 그 책을 읽는 행위가 “지금 한국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다”는 아우성이었다. 대장동 ‘50억 클럽’과 위안부 피해자 후원금 횡령처럼 악이 선을 조롱하는 일은 지금도 왕왕 일어난다. ‘회란기’로 극장에서나마 대리 만족을 경험한다. 거짓은 탄로나고 부정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것을 박력 있고 유머러스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의를 손바닥처럼 뒤집고 피해자 흉내나 내는 우리 시대의 철면피들을 후려친다.
하이라이트는 재판 장면이다. 판관 포청천은 석회로 바닥에 원을 그리게 한다. “아이를 원 안에 세워라. 두 여인은 원 밖으로 아이를 끌어당겨라!” 두 어미가 아이의 팔을 어떻게 잡아당기는지 관객은 목격한다. 망설이다 물러서는 쪽이 생모(生母)다. 진짜와 가짜가 가려지고 마침내 정의가 실현된다. 진실은 파묻어도 해처럼 드러나고 거짓은 가리고 덮어도 쇠꼬챙이처럼 뚫고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악인이 있다. 벌을 받아 마땅한데 잘 피하는 요령을 터득한, 반질반질한 얼굴로 위장한 사람들이다. 영점을 안 잡고 저울을 쟀나 싶을 만큼 판결이 이상할 때가 있다. 연극 ‘회란기’는 “진실이 거짓을 이긴다는 진리가 외면당하면 속이 상한다. 그러나 여러분, 당장 증명되지 않더라도 장해당처럼 포기하지 말자”고 격려한다. 진실을 꿰뚫어보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세상에는 선량한 사람이 더 많으니까.
이른 봄에 농부는 밭을 갈아엎는다. 마른 겉흙은 속으로 들어가고 촉촉한 속흙이 볕을 쬔다. 자연은 정직하다. 아무리 갈아엎어도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난다. 인생도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다. ‘회란기’는 세상이 덜 살벌하고 더 상식적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바닥에 원을 그린다. 거짓은 탄로나고 부정한 사람은 결국 벌을 받는다. 인과응보에 시차는 있지만 오차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