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대법원장은 2017년 8월 후보자로 지명된 다음날 취재진과 만나 “나는 31년 5개월 동안 재판만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마치 자신을 ‘재판의 달인’으로 소개하려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어떤 수준인지 보여줄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추천위원회 회의 시작 전 추천위원들과 면담을 나누고 있다./뉴시스

한 달 뒤 취임식에서 김 대법원장은 “‘좋은 재판’의 실현을 최우선 가치로 삼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효율적이며 신속한 재판도 중요한 가치이지만, 성심을 다한 충실한 재판을 통해 국민들이 절차와 결과 모두에 수긍할 수 있는 사법을 구현해야 한다”고 했다.

김 대법원장의 임기(6년)는 앞으로 6개월 남았다. 그가 취임 전후로 약속한 대로 됐다면 지금 법원의 재판은 신속하면서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재판 지연’의 심각성은 통계로 확인된다. 김 대법원장이 취임한 2017년 전국 법원에서 민사 합의부 1심 재판은 평균 293일 만에 끝났는데 갈수록 처리 기간이 길어지고 있다. 특히 2020년(309일), 2021년(364일)과 2022년(420일)에는 해마다 50일 넘게 재판이 늦어졌다. 1심이 늘어지면서 항소심과 대법원 재판도 줄줄이 처졌다. 형사 재판도 비슷한 추세로 지체됐다. 재판이 늦어지면 재판받는 국민의 고통이 커질 수밖에 없다. 김 대법원장도 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는 작년 9월 법원의 날 기념사에서 “재판을 받는 당사자는 재판이 지연될수록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라며 “재판 지연에 대한 여러 우려의 목소리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문제는 김 대법원장이 재판 지연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한 고등법원 판사는 최근 언론 기고에서 김 대법원장을 향해 “법원의 재판 현황을 알았는지,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 그 대책은 수립했는지 의문이 든다”면서 “제때 논의해 대책을 마련했다면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 판사는 현재 사법부 상황을 ‘재판의 실패’로 진단하면서 그 원인은 ‘법원장 추천제의 무리한 추진, 시기에 맞는 적절한 사법 행정 부재와 사건 관리 실패’로 파악했다.

김 대법원장은 ‘국민이 수긍할 수 있는 재판’도 약속했지만 역시 지키지 못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20년 7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재판에서 선거법 위반 혐의가 무죄 취지로 뒤집히는 판결을 받을 무렵 대장동 일당 김만배씨가 권순일 당시 대법관을 8차례나 찾아가 만났다는 ‘재판 거래’ 의혹은 지금까지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최고 법원인 대법원 재판의 공정성에 대해 심각한 의문이 제기됐지만 김 대법원장은 자체 조사도 하지 않고 사실상 손을 놓았다.

‘김명수 법원’에서는 국민이 납득하기 힘든 일이 잇따라 터졌다. 김 대법원장은 취임사에서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온몸으로 막아낼 것”이라고 해놓고 후배 판사를 민주당이 강행한 ‘억지 탄핵’에 희생양으로 보냈다. 우리법연구회 출신 판사를 같은 법원에 붙박이로 두고 ‘조국 재판’ ‘울산시장 선거 재판’을 뭉개기도 했다. 김 대법원장이 2020년 대법관 후보에 자신이 원하는 판사를 넣으려고 추천위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법원 전산망 전체가 마비돼 재판 일부가 연기되고 전자 소송, 사건 검색 등 대국민 서비스가 전면 중단되는 초유 사태도 터졌다.

김 대법원장은 오는 9월 퇴임하기 전에 국민 앞에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 사법부를 다시 바로 세우는 일은 다음 대법원장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