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수도 앙카라에서 남쪽으로 약 600㎞ 지점에 원자력발전소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다. 올여름 시운전에 들어가는 튀르키예의 첫 원전 ‘아쿠유 원전’이다. 각각 1200메가와트(MW)급 규모의 원전 1~4호기가 올해부터 연차적으로 가동돼 향후 튀르키예 전력 수요의 약 10%를 맡게 된다. 이 원전에 터빈 냉각장치, 열교환기 등 각종 설비를 공급하는 회사는 우리나라의 중소기업 A다. 이 회사는 지난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밀어붙이자 필사적으로 해외 원전에 문을 두드렸다. 튀르키예 원전에 들어가는 800억원 상당의 설비를 납품하게 된 것도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다. 회사 관계자는 “지난 5년간 탈원전으로 굉장히 힘들었다”며 “우리나라 원전 생태계가 얼어붙은 당시에 러시아 원전기업 로사톰을 비롯해 해외 기업들을 일일이 찾아가 판로를 열었다”고 했다. 지난해 A사는 매출의 80%를 해외 수출로 올렸다.
탈원전 한파를 버텨온 이 회사는 창사 약 30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시가총액이 수조원에 이르는 국내 대기업과 분쟁이 발단이다. A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화력발전소 건설을 수주한 대기업 B사에 급수가열기 44기를 243억원에 공급하는 계약을 2014년에 맺고 이듬해 납품을 끝냈다. 그런데 2021년 B사가 급수가열기 4기에서 균열이 생겼다며 당시 3200만달러(약 350억원)를 A사에 청구했다. 44기 전체 급수가열기 공급액보다 100억원이 많은 액수이고, A사 연간 매출의 절반에 달한다.
A사는 “가열기 균열은 현지 발전소의 운전 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계약서에 명시된 하자보증기간(납품일로부터 4년)도 지났는데 대기업이 책임을 과도하게 떠넘기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B사는 계약 당시 교부·서명한 구매 계약 일반 조건에 잠재적 하자(숨겨진 결함) 조항이 있어 장기간 배상 청구를 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현재 이 다툼은 영국 런던에 있는 국제상공회의소(ICC) 산하 국제중재재판소에서 살펴보고 있다. 대기업인 B사가 계약 준거법을 영국법으로 정하고 1850만달러(약 200억원) 규모 손해배상 청구 중재를 신청했기 때문이다. A사는 “국제 중재 대응에 서툰 중소기업의 약점을 노리고 압박하는 대기업의 횡포”라며 대한상사중재원에서 처리하자고 B사에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항공·숙박과 법률 자문, 중재 비용 등이 국내보다 많이 드는 국제 중재는 중소기업 입장에선 큰 부담이다.
정작 A사가 말하는 대기업 못지않게 중소기업의 발목을 잡는 것은 정부의 늑장 행정이다. A사는 B사가 영국법을 준거법으로 삼고 국제 중재로 끌고가는 이유가 우리나라 하도급법과 공정거래법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라며 지난해 2월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했다. B사의 잠재적 하자 보증 기간이 표준 하도급 계약서에 비해 지나치게 길어 부당 특약이고, 거래상 지위 남용 행위라는 주장이다. 또 다른 중소기업들도 같은 피해를 당하고도 굴복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B사가 체결한 하도급 계약을 전수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신고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공정위 판단은 나오지 않은 상태다. 그사이 A사는 국제 중재에서 거액의 손해배상 청구를 받고 있다는 점이 악재로 작용해 해외 기업과의 신규 계약이 막히고, 투자 유치와 은행 대출 채무 연장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다리다 못해 A사는 지난달 1만1000여 명의 탄원서를 받아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출했다. 탈원전의 족쇄에서 벗어난 기업들이 세계시장을 향해 힘껏 내달릴 수 있도록 관련 정부 부처가 세심하게 살펴봐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