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8%. 코레일이 최근 발표한 고속열차 KTX 정시율(定時率)이다. 올 들어 지난달까지 운행한 3만303편 가운데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열차가 단 58편(0.2%)에 불과하다는 놀라운 성적표다. KTX 정시율은 최근 5년 새 가장 낮은 기록이 99.0%(2022년)일 정도로 압도적이다. 코레일은 “프랑스는 84%, 독일은 75% 정도(2021년 기준)”라며 세계 최고 수준 정시율을 자찬(自讚)했다.
이 같은 정시율이 승객들이 느끼는 ‘체감 정시율’과 너무 다르다는 지적에 코레일 관계자는 “국제철도연맹(UIC) 기준을 적용해 종착역에 15분 59초 이내에 도착한 열차는 모두 정시에 도착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밝혔다. 코레일 자료를 들여다보니 이렇게 한참을 늦고도 ‘정시 운행’으로 분류한 사례가 전체의 19.3%(5852편)에 달했다.
5편 중 1편꼴로 지연 운행한다는 것이지만, 여전히 현실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주말 부부라 매주 KTX를 타고 서울~부산을 오가는데, 느낌상 거의 절반쯤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참에 지난 1년치 기자의 KTX 이용 기록을 모두 조회해 봤다.
휴대전화의 ‘코레일 톡’(열차 예약 앱)에 접속해 지난해 4월 초부터 이달 초까지 ‘발권 완료’된 스마트 티켓을 세어보니 총 150장. 도착 시각 아래 붉은색 글자로 지연 시간이 찍힌 티켓이 71장(47.3%)으로, 전체의 절반에 육박했다. 특히 지난해 12월에는 14편 중 11편(78.5%)이 지연 도착한 것으로 나타났다.
신기한 것은 지연 시간이 대부분 15분 안팎이라는 점이다. 20분을 넘긴 것은 1년 중 3번에 불과했다. 코레일 관계자는 “소비자 분쟁 해결 기준에 따라 20분 이상 지연 도착하면 배상한다”고 했다. 배상금 지급을 피하기 위해 ‘20분 마지노선’만큼은 넘지 않으려는 것으로 보였다.
최근 1년간 지연 도착한 71편의 지연 시간을 합산하니 총 729분. 12시간 넘는 고객 시간이 별다른 사과나 배상도 없이 날아간 셈이다. 전국에서 하루 300여 편의 KTX를 이용하는 승객 20여 만 명이 이렇게 잃어버린 금쪽같은 시간은 또 얼마나 될까. 교통 전문가들은 “코레일이 더는 UIC 기준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나라마다 국토 면적과 운행 거리 등 상황이 제각기 다른데, 한참 느슨한 정시율을 잣대로 ‘세계 최고 수준’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은 난센스라는 것이다.
코레일 측은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주의 운전을 시행하는 등 안전 조치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지연이 발생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잇따르는 열차 탈선과 사망 사고에도 경영진 누구도 문책하지 않고, 국토부 장관 ‘안전 지시’마저 뭉갠 전력(前歷)의 코레일이 내놓은 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전문가들은 “어떤 악천후나 교통 상황에도 제시간에 도착할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이 소비자가 KTX를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라며 ‘소비자를 배신한 기업’은 결코 생존할 수 없다고 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신화’를 만들어낸 권오현 회장은 ‘초격차’라는 책에서 “생존을 원한다면 혁신해야 한다. 개선은 임시방편일 뿐”이라고 ‘혁신 의지’를 강조했다. 이미 타성에 젖어 있는 사람을 그대로 놔둔 채 혁신에 성공한 예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승객과 약속을 1분 1초라도 어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는커녕 아직도 집단적 태만으로 똘똘 뭉쳐 변명으로 일관하는 코레일이 새겨들어야 할 고언(苦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