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셜미디어 이용자가 이런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뉴질랜드는 1893년에 세계 최초로 여성 참정권이 인정됐는데, 한국은 1948년이 돼서야 여자에게 투표권을 줬다.’ 너무 늦었다는 의미였다. “그전까지는 식민지였기 때문에 남성 역시 보통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다”며 답답해하는 반응이 많았다. 역사적 맥락을 모른 채 현재의 기준으로 과거의 일을 평가하려 할 때 나타나기 쉬운 오류의 사례로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었다. 박지향 서울대 명예교수는 최근 연구서 ‘윈스턴 처칠, 운명과 함께 걷다’에서 이런 언급을 했다. 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서 홀로 나치 독일과 맞선 것에 대해, 1970년대 일부 수정주의 학자들은 “히틀러와 맞서 싸우지 말고 타협해서 영국의 국력이 소모되는 것을 피했어야 한다”고 볼멘소리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당시 처칠이 히틀러와 손을 잡았다면 영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온전하게 보전되리란 보장이 있었을까. 그마저 굴복해 히틀러가 유럽 전역을 장악했더라면 영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지도상에서 사라졌거나, 살아남았더라도 전체주의 제국의 속국 정도로 전락했을 것이다.
이런 식의 과거사 해석은 ‘1950년 9월 더글러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한반도는 민족의 염원대로 통일됐을 것’이라는 국내 일각의 주장과 통하는 점이 있다. 앞서 언급한 ‘뉴질랜드보다 훨씬 늦은 한국의 여성 참정권’이란 식으로 현재의 시점에서 단순하게 과거사를 해석한다면 얼핏 그럴듯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분명 그때 맥아더가 아니었더라면 ‘남북통일’은 불과 몇 개월 안에 실현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과연 어떤 통일이었을까. 북한군은 부산까지 침공해 한반도 전역을 점령했을 테고, 대한민국 정부는 미 극동군사령부의 비밀 작전계획처럼 사이판이나 파푸아뉴기니 같은 해외로 망명했을 공산이 크다. 적화(赤化)통일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산주의 진영 내 소련의 위성국으로 자리 잡는 동시에, 대한민국은 수립 2년 만에 멸망한 나라로 역사에 기록됐을 것이다.
역사의 맥락을 가린 채 미사여구(美辭麗句)로 분식하고, 거기에 불순한 의도까지 더한다면, 사람들은 그 말의 화살촉이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속아 넘어가게 된다. 한 예로, 1948년 제주 4·3 사건이 ‘통일정부 수립 운동’이었다는 미사여구는 이제 전직 대통령까지도 자연스러운 듯이 쓰는 말이 됐다.
그 말은 4월 3일 제주에서 무장폭동을 일으킨 남로당의 슬로건이었고, 진짜 의도는 5·10 총선거를 무산시켜 대한민국의 탄생을 막는 것이었다. 무고한 제주도민에 대해 군경이 탄압과 학살을 자행한 것은 비난받을 일이지만, 폭동의 주체 세력이 말살하려 했던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에서 윤택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통일정부 운동 운운한다면 코미디가 따로 없다.
대한민국에서 이처럼 피아(彼我) 구분에 혼란이 일어나는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10년 전 지방 도시에서 광복절 행사 때 시립 청소년 합창단이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고 나와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체 게바라가 쿠바의 공산 혁명을 세계로 ‘수출’한 인물이자 1960년 쿠바 정부 대표로 방북해 김일성을 만난 친북 인사였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외면한 채 그저 혁명과 저항의 아이콘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그런 현상은 더 심해졌다. 국가 기간시설을 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는 방안을 논의했던 사람을 ‘양심수’로 미화해 사면을 요구하고, 급기야 한국사 교과서에서 ‘기업 활동의 자율성을 확대했다’며 북한 김정은 정권을 미화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역사를 남이 떠먹여 주는 대로만 공부한다면 선전과 선동이 잘 먹히는 우중(愚衆)이 되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