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연봉이 1억원이 넘는 은행원들이 작년 9월 임금 6.1% 인상, 정년 65세 연장, 주 4일 근무 등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벌였다. 사진은 서울시청 앞 세종대로에서 총파업 결의대회를 열고 구호를 외치는 은행원들. /뉴스1

금융계 취재기자 시절, 사석에서 금융지주 회장을 만나면 사주(四柱)를 물어보곤 했다. 우리나라 월급쟁이 중 이분들만큼 좋은 운을 타고 난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은행업은 시장을 편하게 나눠 먹는 과점 업종이다. 손쉬운 돈벌이 덕에 은행원은 평균 연봉이 1억원이 넘는다. 금융지주 회장은 임직원 2만~3만명의 수장이다. 주인 없는 금융 그룹에서 오너 같은 지위를 만끽한다. 3대가 덕을 쌓지 않고는 얻기 힘든 자리가 아닐까. 그러니 저마다 연임 욕심을 내고, ‘셀프 연임’ 논란이 벌어진다.

하지만 한국 경제에서 은행업은 그다지 명예롭지 않다. 대표적 ‘우물 안 개구리’ 산업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기득권 유지와 지대(地代) 추구에 매몰된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고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은행은 ‘기득권’과 ‘지대’의 대표 업종이다. 근속 연한이 쌓이면 월급이 자동으로 올라가는 호봉제 덕에 고임금을 누리지만 은행원 실력은 세계 하위권이다. 부실 투자상품에 대한 기본 감식안도 부족해 라임·옵티머스 사태, 독일 헤리티지 펀드 등 고위험 투자상품을 무분별하게 팔아 고객들에게 큰 손실을 끼쳐 왔다.

우리나라 은행들은 20년 전 국가와 국민에게 큰 신세를 진 바 있다. 과다한 외채 도입과 무분별한 기업대출 탓에 은행들이 부도 위기에 몰렸을 때 168조원의 공적자금 투입 덕에 기사회생했다. ‘손실의 사회화’ 덕에 살아남았음에도, 독과점 면허 덕에 손쉽게 얻는 이익은 철저히 ‘사유화’하면서 자기들끼리 나눠 먹고 있다.

지난해 국내 은행들은 물가를 잡기 위한 한국은행의 금리 인상 덕에 50조원대 이자수익을 올렸다. 막대한 수익 창출엔 얌체 영업도 한몫했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2%포인트 이상 올리는 동안 은행들은 대출금리는 빠르게, 예금금리는 느리게 올렸다. 그 결과 예대금리 차가 2014년 이후 최대폭(2.46%포인트)으로 벌어져 이자 마진을 더 키웠다. 은행 노조들은 이런 이익을 근거로 정년 65세 연장, 주 4일 근무, 임금 6.1% 인상을 요구하며 총파업까지 벌였다. 코로나 사회적 거리 두기를 이유로 영업시간을 1시간 단축했던 은행들은 거리 두기 해제 이후에도 영업시간 단축을 그대로 유지하는 등 이래저래 ‘국민 밉상’이 되고 있다,

새해를 맞아 금융지주 회장들은 ‘위기’를 말하며 “빙하기에 견딜 수 있는 체력을 기르자”(KB 회장), “그 어느 때보다 변화와 혁신이 절박하다”(신한지주 회장)고 강조한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선 매년 그랬듯 성과급·명퇴금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명퇴 조건은 갈수록 후해져 요즘엔 퇴직자들에게 자녀 대학 학자금 2800만원, 재취업 지원금 3400만원, 퇴직자 본인·배우자 건강검진비까지 지원해 준다.

반면 주주들에게 은행 주식은 만년 저평가주다. 주식 가치가 은행 보유 자산의 30% 수준에 불과하다. 은행들은 이익의 4분의 1 정도만 배당하고, 자사주 매입·소각 같은 주가 관리에도 인색하다. 은행 임직원 그들만의 잔치에 참다 못한 행동주의 펀드가 ‘주주 환원 확대’를 요구하고 나섰다. 은행이 국민 밉상 기업이 된 데는 경영진이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노조와 타협해온 탓도 있다.

갑작스레 밀려온 고금리 파고 탓에 국민 다수가 이자폭탄에 신음하고 있다. 은행들이 고통 분담에 나서야 한다. 생색내기 수준이 아니라 금융 취약 계층의 빚 부담을 실질적으로 덜어주는 조치를 내놓을 필요가 있다. 나아가 직무급을 도입해 ‘호봉제-고비용 명퇴’ 악순환을 끊고, 이익 주주 환원을 확대하는 것이 상장기업으로서 제 기능을 하고 국민에게 진 신세를 갚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