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조선디자인랩 정다운

윤석열 대통령이 내년 예산안을 의결하는 국무회의에서 “지난 정부가 5년 동안 400조원 이상 국가 채무를 늘려 현 정부가 일을 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은 이틀 뒤 국정 브리핑에선 “건전 재정 기조를 굳건히 지킨 결과, 국가 재정이 더욱 튼튼해졌다”고 말했다. 과연 그런가.

문재인 정부가 5년간 국가 채무를 400조원 이상 불린 것은 사실이다. 정확한 수치는 409조원이다. 그런데 건전 재정을 주요 국정 과제로 내세운 윤 정부도 2년간 국가 채무를 128조원 늘렸다. 세 번째 짠 2025년 예산까지 포함하면 윤 정부가 3년간 늘리는 국가 채무는 209조원에 달한다. 연평균으로 환산하면 ‘문 정부 80조원, 윤 정부 70조원’. 크게 다르지 않다.

비교의 공정성을 위해 감안해야 할 요소가 두 가지 있다. 문재인 정부 때는 미증유의 코로나 사태가 있었지만, 윤 정부에선 그 정도 초대형 돌발 악재는 없었다. 또 하나 윤 정부의 나랏빚 수치에는 ‘재정 꼼수’ 변수가 숨어있다. 윤 정부는 지난해 환율 관리 자금 곳간인 외국환평형기금에서 20조원을 끌어와 세수 구멍을 메우는 데 썼다. 이 돈은 정부가 환율 방어를 위해 외환보유액 달러를 내다 판 돈이 원화로 바뀌어 외평기금에 쌓인 것이다. 정부가 관리하는 기금 돈이라 국가 채무로 잡히지 않았다. 일각에선 적자 국채를 발행하지 않고 세수 구멍을 메우는 ‘묘수’라고 주장했지만, 전례 없는 꼼수였다.

국회예산정책처는 ‘2023회계연도 결산 분석’에서 “달러 대응 자산이 있는 ‘금융성 채무’를 향후 세금으로 갚아야 할 ‘적자성 채무’로 전환해 국가 채무의 질이 악화됐다”고 두리뭉실 지적했다. 쉽게 풀이하면 정부가 새 빚을 내는 대신 보유 자산을 팔았다는 뜻이다. 미래 세대가 가용할 양식을 미리 빼먹는다는 점에서 오십보백보다. 국회예산정책처는 “2024년 예산안을 보면 정부가 올해도 외평기금 43조원을 끌어다 쓸 것으로 보인다”고 예상했는데, 예상대로 돌아가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올해 30조원 이상 구멍 날 세수 결손을 메우는 데 작년처럼 외평기금을 동원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부의 꼼수도 이젠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정부가 21년 만에 원화 외평채를 8조원 이상 발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외평기금마저 바닥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정부는 내년엔 국채를 201조원어치나 발행하겠다고 예고하고 있다. 사상 최대 규모다. 세수 구멍을 더 이상 돌려막기가 어려워져서 이젠 국채 발행으로 재정 적자를 메우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변화이다.

지난 정부의 방만한 재정 운용 탓에 윤 정부의 재정 정책 운신의 폭이 좁아진 것은 사실이다. 전 정부로부터 비롯된 과다한 가계 부채 탓에 내수 회복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대표 정책으로 내세운 감세 정책이 반도체 경기 둔화 사이클과 맞물리며 세수 펑크를 촉발한 점은 윤 정부의 불운, 혹은 실책으로 볼 수 있다.

윤 정부의 어려운 정책 여건은 국민들도 다 안다. 대통령이 국정 브리핑에서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국민 체감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하나 분명해진 것은 기초연금, 병장 월급 200만원, 대학생 75% 국가장학금 지급 등 대못 박힌 포퓰리즘 정책 탓에 보수 정부든, 진보 정부든 국가 채무 증가세를 막는 건 갈수록 난제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권과 정부 스스로는 제동을 걸지 못하니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강제로 채울 필요가 있다. 유럽처럼 재정 적자를 GDP의 일정 비율 이상 넘지 못하게 강제하는 ‘재정 준칙’ 법제화를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