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창신동 백남준 기념관/뉴시스

요즘 말로 금수저였던 백남준이 유년기를 보낸 서울 창신동 집은 일대에서 큰대문집으로 통했다. 터가 3000평이 넘었다고 한다. 그곳에 조성된 백남준기념관이 문을 닫는다는 보도에 대한 서울시립미술관의 해명을 읽으면서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있었다. “생가가 아니라 유년기의 거주지로 추정되는 일부 집터에 건립된 한옥을 개조한 것으로 건물의 역사적 의미가 크지 않다. 협소하고 유작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 거듭 읽어봤지만 운영 종료를 정당화하기 위해 기념관의 의의를 축소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백남준은 다섯 살부터 열여덟에 한국을 떠날 때까지 창신동에 살았다. 훗날 그는 도포 차림에 지구본을 지게에 지고 옛 집터를 찾아가는 자기 모습을 영상에 담아 작품에 사용했다. 기념관에선 “나의 정신적 모체가 된 우리 것에 대한 적극적 조명을 하고 싶다”며 ‘창신동 고가’를 한 예로 든 발언을 소개하고 있다.

2017년 개관 때 서울시가 “백남준은 이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창작의 근원이 되는 영감을 키웠다”면서 “역사·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지역”이라고 했던 이유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있었던 의미가 지금은 없다고 한다.

백남준은 우리가 생각하듯 우리만의 백남준이 아니다. 그가 유학한 곳이자 아내의 모국인 일본, 전위 운동 플럭서스를 이끌었던 독일, 미디어 아트의 창시자로서 정착하고 생을 마감한 미국이 저마다 자신들의 백남준을 주장한다. 백남준과 ‘다다익선’을 합작한 건축가 김원은 그를 두고 저서에서 “자기 말마따나 한국이 생산해낸 가장 비싼 수출품임에도 아직 원산지 증명이 안 되어 있다”고 표현했다. 구글에 그의 영문 이름을 검색하면 미국 예술가라는 설명이 제일 앞에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예술가의 원점(原點)과도 같은 자리에 애써 마련한 이정표를 “관람객 방문이 저조하다”며 굳이 없애려 하고 있다.

백남준만이 아니다. 며칠 전 버스를 타고 남산 소월길을 지나며 힐튼호텔의 앞날을 생각했다. 우리 디자인과 기술로 세계적 건축물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1980년대에 보여준 걸작. 재개발로 호텔이 문을 닫고 건물이 철거 위기에 놓이자 설계자 김종성이 해법을 제안했다. 많은 사람에게 각인된 아트리움과 파사드(전면부) 부분을 고급 아파트와 사무용 건물로 고쳐 보존하는 대신 부지 다른 자리에 더 높은 건물을 짓게 해주는 방안이다.

개발 논리에 반대한다며 무조건 보존을 외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현실적이지는 않기에 개발사의 재산권도 존중하는 대안을 찾은 것이다. 건축물의 앞날은 불투명하다. 입구에 붙은 ‘양복점 영업 중’ 현수막이 어쩐지 마지막 안간힘처럼 보였다.

건축계에선 우리의 문화적 무지막지함을 보여준 예로 ‘카사 델 아구아’를 지금도 이야기한다. 프리츠커상 심사위원을 지낸 멕시코 출신 건축가 리카르도 레고레타가 제주에 호텔 모델하우스로 지었던 건물이다. 기한이 지나자 불법 건축물이 됐고 건축계 안팎의 보존 노력에도 2013년 철거됐다. 멕시코에서도 철거 반대 여론이 일었지만 행정대집행 영장 앞에 예외는 없었다. 막말과 꼼수가 난무하는 국회에서 희화화되는 것 같아도 법은 역시 준엄했다.

우리는 왜 남겨야 하는지를 질문해 왔다. 존재 이유를 입증하지 못하면 없애는 게 기본이었다. 동대문운동장이 사라졌고 충정아파트도 철거 결정이 내려졌다. 피맛골은 빌딩에 파묻힌 먹자골목이 됐다. 이제는 왜 없애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합당한 이유가 입증될 때까지는 신중해야 한다. 내버려두는 것만이 항상 최선은 아닐지라도 질문을 바꿀 때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쉽게 없애고 너무 간단하게 헐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