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전자상가 TV매장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사 내용과 관계 없는 사진. 2022.7.21/뉴스1

방송국마다 진행하는 연말 시상식은 어린 시절 나에게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시상식을 보며 새해 떡국에 넣을 만두를 빚을 때, 비로소 한 해를 제대로 떠나보내기 위한 집안의 의식은 완성됐다. 마치 주말이 끝났음을 알렸던 ‘개그콘서트’ 이태선 밴드의 음악처럼 시상식은 그 자체로 지나간 한 해의 에필로그인 동시에 다가오는 새해의 프롤로그였다.

하지만 지난 연말 시상식 방송을 보는 감정은 씁쓸하기만 했다. 화제성은 사라진 지 오래. 2000년대에 데뷔한 연예인들이 아직도 상을 휩쓰는 장면은 그 시절 멈춰 버린 낡은 시계를 보는 것 같았다. 자격이 없다는 게 아니다. 다만 여전히 그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방송계의 애환 같은 게 느껴졌을 뿐이다.

방송가의 세대교체 실패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무엇보다 1020 세대가 TV를 안 본다. 방송통신위원회의 ‘2022년 방송매체이용행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주 5일 이상 TV를 보는 사람의 비율은 30대만 해도 응답자의 67.8%였지만 10대의 경우 25.2%에 불과했다. 일상생활에서 TV가 필수라고 답한 비율 역시 50대 31.8%, 60대 52.5%였던 반면 10대와 20대는 각각 1.6%에 그쳤다.

그렇다고 10대와 20대가 방송을 소비하지 않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들이 즐기는 콘텐츠들은 각종 플랫폼을 타고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공중파에선 무명이었던 코미디언이 유튜브에서 수십, 수백만 구독자를 보유하는 건 예사다. 대중에게는 이름도 생소한 아이돌이 빌보드 차트에 오르거나 한 해에 수백만 장의 앨범 판매량을 기록하는 일도 이젠 새삼스럽지 않다.

유튜브‧인터넷 방송을 비롯한 매체의 다변화는 1020 세대가 접할 수 있는 콘텐츠의 가짓수를 거의 무한대로 늘렸다. 덕분에 자기 취향에 딱 맞는 콘텐츠를 ‘좁고 깊게’ 소비하는 게 가능해졌다. 이런 경향은 소통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청년층이 축구‧게임‧패션 등 주제별로 만들어진 대형 온라인 커뮤니티(이용자가 많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소통해 왔다면, 청소년들 사이에선 아예 미시적인 관심사를 주제로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을 만들고 끼리끼리 소통하려는 모습도 보인다. 취향과 관심사가 극단적으로 세분화된, ‘초분화(超分化)’ 세대라고 할 수 있다.

1020 세대 내 분화는 문화적 취향에 국한하지 않는다. IMF 외환 위기 후 양극화가 심화된 시대에 나고 자란 이들은 경험도 생각도 판이하다. 계층적으로 이질적인 환경에서 자란 까닭이다. 요 몇 년 청년이라고 하면 으레 오마카세나 골프 같은 취미를 즐기는 사치족(族)들로 묘사되곤 했는데 그 반대편에 ‘지옥고’(반지하‧옥탑방‧고시원)에 살며 고물가에 허덕이는 이들도 많은 게 사실이다. 동 세대에서도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다른 문화를 즐기는 이들은 결코 한 가지 유형으로 정의될 수 없다.

올해 총선에서도 무당층 비율이 높은 청년층 표심을 끌어안기 위한 정치권의 경쟁은 뜨거울 것이다. 이미 지난 대선처럼 청년층 지지를 단번에 끌어올릴 ‘킬러 콘텐츠’를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즘은 그럴 만한 이슈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청년 세대를 관통하는 보편적 정서를 찾기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같은 세대 안에서조차 공통된 경험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서다.

파편처럼 나뉜 이들을 하나의 깃발 아래 모으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이럴 때 필요한 건 서로 다른 생각과 가치를 존중하고 사람들 사이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노력이 아닐까. 다양한 입장을 인정하고 조율하는 능력이야말로 다가오는 시대에 우리 정치가 가져야 할 덕목이요, ‘초분화’ 세대를 끌어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