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1916~1988)는 동아출판사가 1957년 선보인 활자의 원도(原圖·본이 되는 글씨)를 그린 인물이다. 동아출판사는 종전의 수작업보다 정교하게 활자를 깎는 자모(字母) 조각기를 당시 민간 최초로 도입했다. 그러나 기계가 아무리 정교한들 설계도 격인 원도가 엉성하면 의미가 없었기에 김상문 창업주는 어려서부터 명필 소리 들었던 최정호를 도안가로 발탁했다. 활자 개량은 민중서관·대한교과서 등으로 확대됐고 “1960년대 초의 왕성한 전집물 제작을 감당할 힘”(대한출판문화협회 30년사)이 됐다.
활자에 이어 보급된 사진식자 인쇄도 글자에 빛을 비춰 감광지에 인화시키는 방식이어서 역시 원도의 완성도가 중요했다. 최정호는 국내에서 널리 쓰인 일본제 모리사와·샤켄 식자기의 한글 원도를 그렸다. 이것이 오늘날 명조체·고딕체 디지털 글꼴의 바탕이 됐다.
최정호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얼마 전 소셜미디어에서 접했다. 최정호의 삶과 원도 작품을 단출하게 소개한 온라인 박물관이었다. 균형미가 뛰어난 최정호의 원도를 보면서 서체 디자인의 거장 아드리안 프루티거가 숟가락에 비유했던 좋은 글꼴의 정의를 떠올렸다. 프루티거는 “수프를 떠먹고 나서 숟가락 모양이 기억난다면 잘못된 것”이라고 했었다. 모양엔 눈길도 가지 않을 만큼 기능에 충실한 숟가락처럼, 최정호의 원도엔 인위적인 기교가 없다. 어떤 글자 크기나 굵기에서도 또렷하고 편안하게 읽히며 정보를 전달한다는 본분에 충실할 뿐이다.
후세 디자이너들의 인터뷰를 담은 영상도 있었다. 한글에도 조예가 깊은 독일 출신 디자이너 요아힘 뮐러-랑세의 발언이 인상적이었다. “전후 서구에서 시도된 다채로운 글꼴 디자인과 달리 최정호는 나라에 보다 유용한 글꼴을 제공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장차 다른 이들이 발전시켜 갈 디딤돌로서 자신의 글꼴이 안정성과 신뢰성을 지니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출판사 서체가 나온 1957년 스위스에서는 헬베티카(Helvetica)가 탄생했다. BMW·맥도널드·3M 같은 글로벌 기업 로고에도 들어가는 헬베티카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알파벳 글꼴이다. 그 이름은 스위스의 라틴어 명칭인 헬베티아(Helvetia)에서 왔다. 지난해 한국-스위스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서울에서 열린 전시의 주제도 헬베티카였다. 전 세계에서 쓰여도 헬베티카는 스위스의 국가적 문화 자산이다.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한글을 나라의 자랑으로 여기는 우리는 한글 디자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
누구나 글을 쓰고 읽는다. 워드프로세서에 기본 탑재되는 글꼴만 수십 종이다. 글자는 공기와 같아서 원래부터 ‘그냥’ 존재해온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글꼴들도 누군가 정성들여 디자인한 결과물이며 거슬러 올라가면 그 바탕을 만드는 데 일생을 바친 인물이 있다. 최정호는 잊힌 이름이었다. 글꼴 디자이너들은 지금도 누구나 최정호를 이야기하지만 그 밖의 사람들은 지금껏 누구도 최정호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최정호 박물관 소식은 하나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우리는 한글 디자인의 숨은 개척자를 기리는 ‘진짜’ 박물관도 갖게 될까? K컬처가 세계를 휩쓰는 지금 명조체·고딕체가 대수냐는 비아냥이 벌써부터 들리는 듯해서 ‘한글 디자이너 최정호’(안상수·노은유)의 한 대목을 옮겨 본다. “최정호의 한글꼴은 오늘날 쓰는 본문용 디지털 폰트에 큰 영향을 주었고, 특히 명조체와 고딕체는 그의 땀과 노력을 딛고 지금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글로 읽고 쓰는 대부분의 사람은 책을 읽을 때, 컴퓨터를 할 때, 길거리를 수놓은 글자를 볼 때마다 최정호가 남긴 유산의 덕을 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