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광장에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한 해치가 전시돼 있다. 서울시는 기존 노란색에서 분홍색으로 새롭게 바뀐 해치를 8m의 대형 아트벌룬 형태로 만들어 시민에게 공개했다. 2024.2.1/연합뉴스

이달 1일 서울패션위크 객석 먼발치에서 본 오세훈 서울시장은 회색 재킷 안에 분홍 터틀넥을 입고 있었다. 패션쇼장이라서 색다르게 입었나 했다가 며칠 뒤 서울시 보도자료를 보면서 또 다른 의미를 깨달았다. 자료에 따르면 그날 행사장이었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15년 만에 새로 디자인한 서울시 캐릭터 ‘해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높이 8미터짜리 분홍색 해치 인형을 소개하는 오 시장의 영상을 보니 의상을 고른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영상의 인형을 본 기억은 나지 않았다. 아마 봤어도 해치인 줄 몰랐을 것이다. 색깔뿐 아니라 생김새가 예전의 노란색 해치와 완전히 달랐다. 해치 고유의 날개와 비늘은 유지했다는데, 해치에 그런 게 있었다는 걸 설명을 보고 처음 알았다.

‘하이 서울’(이명박)에서 ‘아이 서울 유’(박원순)로, 다시 ‘서울 마이 소울’(오세훈)로 시장의 당적(黨籍) 따라 달라진 표어와 달리 해치는 2009년 처음 발표했던 오세훈 서울시에서 스스로 바꿔버렸다. 인지도가 낮아져서 ‘재도약과 혁신’이 필요했다고 한다. 새 해치가 성공하기를 바라지만, 만약 노란 해치에 이어 분홍 해치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그땐 빨간 해치로 또 혁신할 것인지 궁금하다.

해치를 새로 선보이면서 이른바 ‘젊은 느낌’을 주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이번에 해치의 친구들인 사신(四神) 캐릭터를 함께 만들었는데 ‘시니컬한 페르소나’인 주작(朱雀)의 이름은 ‘빡친 주작’, 자기가 강아지인 줄 아는 청룡(靑龍)은 ‘댕댕 청룡’이라고 한다. 빡친다(화난다), 댕댕이(멍멍이) 같은 유행어를 쓰고 그것을 마블 유니버스의 배경을 설명할 때처럼 ‘세계관’이라 부르는 것이 보도자료의 표현대로 “MZ를 비롯한 다양한 세대에게 골고루 사랑받을 수 있는 힙(hip)한 트렌드”인 모양이었다.

디자인으로 도시 브랜드를 만든 가장 성공적 사례는 아마도 밀턴 글레이저(1929~2020)의 ‘I♥NY’(1977)일 것이다. 하트(♥)는 그때까지 사랑(love)의 기호로 쓰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디자이너의 직관을 바로 이해했다. 글레이저가 지식재산권을 뉴욕주(州)에 기탁한 이 로고는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나 자유의 여신상 못지않은 상징”(뉴욕타임스)이 됐다. 뉴욕이 9·11 테러 공격을 받자 글레이저는 로고 밑에 ‘MORE THAN EVER(그 어느 때보다도)’를 추가해 포스터를 만들었다. 뉴욕데일리뉴스는 이를 1면에 가득 차게 실어 배포했다. ‘I♥NY’가 애도와 희망의 아이콘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여러 도시에서 아류작이 나오기도 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한다. 좋은 디자인은 긴 말이 필요 없다는 점. 그리고 관(官)에서 발주했더라도 디자인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결국 향유하는 사람들이라는 점. ‘I♥NY’는 뉴욕주가 관광 홍보 캠페인에 몇 달 쓰려고 글레이저에게 의뢰해 탄생했지만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디자이너의 탁월한 창의, 사람들의 진심 어린 애정, 범죄 도시에서 세계의 수도로 거듭난 뉴욕의 매력이 오랜 화학작용을 일으킨 결과다. 뉴욕주는 글레이저가 9·11 버전을 만들자 그를 상대로 저작권 침해 소송을 하려고 했다. 글레이저는 생전 인터뷰에서 이 일을 언급하며 “관료 조직을 상대하다 보면 그들이 자기 자신 말고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고 했다.

‘I♥NY’ 못지않은 서울의 상징을 보고 싶다. 해치가 그 주인공이 될지는 지금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충분한 매력이 있고 상징 디자인에 그만한 설득력이 있다면 사람들은 기꺼이 즐길 것이라는 사실이다. 힙한 세계관을 일일이 가르쳐주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