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베컴 형이 돼지 껍데기 먹는 걸 인스타에서 다 보고.” 지난달 말 세계적인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이 서울 고깃집에서 삼겹살과 돼지 껍데기를 구워 먹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소셜미디어에 올라오자 달린 댓글 중 하나다. 시쳇말로 ‘빵’ 터졌다. 나 역시 그 사진을 보면서 ‘합성 같다’고 생각하며 웃었으니까.
솔직히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귀네스 팰트로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김밥에 빠졌다”고 고백하고, 스칼릿 조핸슨은 “내가 한국 사람보다 김치를 더 좋아할 것”이라고 말하는 요즘이라니.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온 세상이 K푸드에 열광하게 된 것일까?
궁금증이 풀린 건 지난 16일 일본 도쿄에서다. ‘불닭볶음면’을 세상에 내놓은 삼양라운드스퀘어 김정수 부회장은 국내 언론 중에선 처음으로 한 본지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불닭볶음면이 해외에서 누적 50억개가 팔린 게 작년 7월쯤이에요. 라면이 자동차·반도체보다 단가는 훨씬 낮겠지만, 더 대단할 수 있어요. 매일 야금야금 전 세계 사람들 입맛을 파고들었으니까요. 우리 음식에 익숙해진 세계인의 입맛은 생각보다 또 오래갑니다. 기술 경쟁의 패권을 잡는 쪽은 계속 바뀌지만, 입맛 권력에서만큼은 우리가 유리할 수 있는 거예요.” 그는 또한 “반도체·자동차·군(軍) 무기가 할 수 없는 일을 소프트파워는 해낸다. 하드파워보다 강하다. 주도권을 잡는 데 오래 걸리지만 그만큼 더 길게 간다”고도 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깨달았다. K푸드는 가랑비처럼 왔다는 것을. 처음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지만, 그 덕에 오히려 세상을 흠뻑 젖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열풍의 핵심엔 자생력과 지속력이 있다. 가랑비는 저절로 내린다. 누가 억지로 하늘에서 들이붓는다고 되지 않는다. 한식 산업화, 한식 세계화가 정부 주도로 추진된 적 있지만 별 소득 없이 끝난 일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해외에 고급 한식당을 만들겠다고 242억원 넘게 썼지만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반면 지금 K푸드 신화는 자생적인 문화 콘텐츠를 통해 절로 싹텄다. 2002년 드라마 ‘겨울연가’, 2013년 ‘별에서 온 그대’ 같은 콘텐츠가 변곡점을 찍었고, 영국인 조시와 올리가 유튜브에서 한국 음식과 문화에 대한 영상을 올리기 시작한 2013년, 방탄소년단이 BTS로 이름을 바꾼 2016년에 그 파동이 더 커졌다.
가랑비는 또한 잔잔히 계속 내린다. 데이비드 베컴의 사례를 뜯어보자. 그가 갑자기 한식을 먹게 된 건 아니다. 한국에 온 6년 전 처음 김치를 먹었고, 지난 2019년에도 유튜브에 출연해 된장찌개를 먹는 모습이 전파를 탔다. 작년엔 마카오의 한 한국 식당에서 유튜버 ‘영국남자’ 조시와 함께 흑돼지구이와 김치찌개를 먹었다. 이제 그는 상추쌈을 ‘a leaf wrap’이라고 말하는 대신 ‘쌈(ssam)’이라고 발음한다. 수년 치 경험이 쌓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국내 한 식품업체 관계자는 “외국인들에게 갑자기 한식이 맛있다고 들이댄다고 되는 게 아니다. 매일 전 세계 곳곳에서 정교하게 균일한 맛의 한식을 보여주려고 땀 흘린 이들의 노력이 이제 결실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비결을 알았으니, 조심할 점도 금세 알 수 있다. 정부는 최근 2027년까지 세계 한식 시장 규모를 300조원까지 키우고, 미쉐린 스타급 한식당 100개를 포함해 해외에 한식당 1만5000개를 늘리겠다고 했다. 미쉐린 한식당이 3년 안에 100개가 늘어난다면, 그 미쉐린은 이미 미쉐린급이 아닐 것이다. 섣부르게 땐 군불이 가랑비에 젖어든 옷을 망칠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