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닌 대학교는 민족해방(NL) 운동권, 그중에서도 경기동부연합으로 불리는 집단의 세가 강한 곳이었다. 통합진보당 주요 정치인을 여럿 배출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2008년 입학할 때만 해도 학교에는 운동권 정서가 남아있었다. 그땐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그랬다.
한번은 입학 전 선배들과 일부 합격자들이 MT를 간 적이 있었다. 대학에 합격한 뒤 가는 첫 MT라니, 사람들과 어울려 놀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그런데 숙소에 도착한 뒤 진행된 프로그램은 오락이나 체육활동이 아니라 정신교육이었다. 선배들은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며 이명박·박근혜가 어떻게 언론을 장악하려 하는지, 주한미군이 왜 철수해야 하는지 같은 주장을 늘어놓았다. 같이 간 동기 누나와 “이게 대학이 맞느냐”며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동기들과 친해질 즈음엔 광우병 사태가 일어났다. 몇몇 선배들이 시위 참여를 강요했다. 따르지 않으면 철없고 몰상식한 20대로 매도했다. 청소년 시절부터 정치나 시사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런 강요가 싫어 집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들을 ‘손절’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학회 회식 때였다. 대장 격인 선배 하나가 대뜸 “너희 우정을 시험해 봐야겠다”라며 찌개 냄비에 술을 붓고 온갖 반찬과 소스를 넣은 뒤 돌아가며 마시라는 게 아닌가. 마지막엔 자기 침까지 뱉었다. 말로만 듣던 ‘엽기 사발식’에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그 사건 이후 나를 포함한 몇몇이 학회를 그만뒀다.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운동권 문화에 대한 반감은 다른 학교도 다르지 않았다. 2000년대 후반 여러 학교에서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들어섰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들은 대체로 등록금 동결이나 편의시설 확충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고 학우들의 마음을 얻었다. 마침 ‘88만원 세대’가 시대적 화두로 떠오른 때였다. 졸업할 즈음엔 ‘헬조선’ ‘열정페이’ 같은 말이 유행했다. 치솟는 등록금과 취업난에 먹고사는 일도 버거워 죽겠는데 ‘우리민족끼리’니 ‘주한미군 철수’ 같은 구호를 내거는 운동권 학생회에 관심을 가질 사람은 없었다. 최소한 1980년대 중반 이후 출생자들에게 운동권의 생명은 그때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코끼리를 생각하게 된다는 미국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말은 유명하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취임 후 첫 일성으로 “586 운동권 청산”을 내걸어 선거의 초점을 1980년대에 맞추었다. 운동권 비판에 구력이 있는 인물들이 전면에 나섰다. 그 모습을 보며 전통적 지지층을 결집하는 덴 도움이 되겠지만 2030 세대 표심은 못 잡겠다 싶었다. 유권자들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데 국민의힘은 스스로를 과거에 가두고 있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총선 출구조사에 따르면 비례대표 투표에서 국민의미래를 선택한 2030은 서너 명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여성만 떼어놓고 보면 20% 안팎이다. 심지어 국민의미래는 20대 이하 남성(31.5%)과 30대 남성(29.3%)에서도 더불어민주연합과 조국혁신당을 합한 것(각각 44.5%, 52.4%)보다 훨씬 적은 지지를 얻었다. 개혁신당을 합해도 견줄까 말까인데, 이는 2030 남성층에서 큰 승리를 거둔 지난 대선·지선과 비교해 보면 참패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2030 세대 중 586 운동권 문화나 가치에 동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세대에서 운동권·종북세력들은 이미 십수 년 전 외면당하고 심판받았다.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 이번에 받은 표는 무엇이냐는 반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2030 세대가 그들의 가치에 동의한다기보다 국민의힘이 집권 여당으로서 그들보다 나은 비전과 어젠다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