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영화 담당 기자를 했을 때 영화제작자와 영화감독들이 모인 자리에서 “기자님은 왜 아이폰을 안 써요? 문화부 기자가, 참 이상하다”는 말을 들었다. 질문이라기보다는 힐난에 가까웠다. 그 뒤에 이어진 말을 들어보니, 예술·문화 방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다 아이폰을 쓰는데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취재를 하는 기자가 아이폰을 안 쓰는 건 뭔가 잘못됐다는 취지였다. 실제로 그 자리에서 아이폰을 안 쓰는 이는 나 하나였다. 괜히 혼나는 기분이 들어서 우물쭈물 변명하듯 얘기했다. 아이폰엔 통화 녹음 기능이 없기 때문에 기자가 쓰기 힘들다고.
아이폰을 쓰지 않는 문화부 기자라는 이유로 “왜요?” “의외네요”라는 말을 그 후에도 종종 들었다. ‘가짜’ 문화부 기자 취급을 받는 것 같아 억울했지만 그들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애플 제품은 유독 창작자와 문화·예술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애플의 소프트웨어는 작곡이나 영상 편집 등 창작 활동에 강점을 갖고 있다. 심미안을 자부하는 사람들은 애플 제품을 두고 ‘황금 비율’을 운운했다. 폐쇄적인 운영체제나 이용자에게 불리한 수리 정책은 문제 될 게 없었다. 굳이 다른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어떤 특정한 면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그런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애플이었다. 전 과목에서 90점 이상을 받는 무난한 모범생이 아니라 다른 과목은 50점을 맞아도 수학과 미술은 100점만 맞는 외골수 천재 같달까. 창작자와 예술가, 혹은 그런 이들을 동경하는 사용자에게 애플은 ‘나를 이해하는 쿨하고 예쁜 친구’였다.
지난주 애플이 ‘크러쉬’라는 제목의 새 아이패드 광고를 내놨을 때 이들은 그렇게 좋아하던 친구한테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악기와 페인트, 레코드 플레이어, 카메라 등 창작에 필요한 모든 도구를 한데 모아 놓고 거대한 압착기로 눌러서 부순 뒤 얇은 아이패드를 그 자리에 등장시킨다. 예전 같았으면 파격적인 광고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 생성형 인공지능(AI)이 음악도 짓고, 그림도 그리면서 영화까지 만들 수 있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분노하고 두려워하는 이들이 바로 창작자와 예술가다. 그들은 산산조각이 난 피아노와 캔버스를 보면서 자신의 뼈가 으스러지고 피가 튀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애플이 더 이상 쿨하고 똑똑한데 예쁘기도 한 친구가 아니라 창작자를 옥죌 수 있는 권력을 가진 빅테크라는 것을 깨달았다. 창작자들의 거센 항의에 애플은 48시간 만에 광고를 내리고 사과문을 냈다.
광고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애플로서는 어안이 벙벙하지 않았을까. 애플은 1984년 맥을 출시하면서 당시 PC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한 IBM을 겨냥한 광고를 했다. 한 여성이 IBM을 상징하는 독재자가 나오는 스크린에 창을 던져 산산조각을 내는 장면은 지금까지도 최고의 광고로 꼽힌다. 당시가 1984년이란 점을 감안해 IBM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속 빅브러더라고 짚어주기까지 했다. 같은 ‘산산조각’이지만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다. 그때 언더도그에 불과했던 애플이 지금은 40년 전의 IBM보다 더 커진, ‘비거브러더’다. 언더도그가 때려부수는 건 들이받는 것이고, 저항이지만 빅브러더가 한다면 그것은 찍어누르기이자 폭압이다.
빅브러더에게 ‘빅’이 붙는 것은 덩치 때문이 아니듯, 빅테크에 ‘빅’이 붙는 것도 단지 매출 높고 회사 규모가 커서는 아니다. 문화적 영향력과 사회적 책임도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애플만의 문제가 아니다. 성공한 기술 기업들은 대부분 스타트업과 같은 언더도그에서 시작해 빅테크로 향해간다.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고려하지 않는다면 빅브러더이자 독재자로도 변할 것이다. 이들에게 창을 겨눌 언더도그, 반항아가 등장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