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초 컴퓨텍스 참석차 대만을 찾은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는 또 가죽 재킷을 입었다. 그는 1년 전 같은 행사로 대만을 방문했을 때도 가죽 재킷을 벗은 적이 없다. 보다 못한 기자가 물었다. “안 더워요?” “아뇨, 전 언제나 쿨합니다(I’m always cool).” 황 CEO의 ‘쿨’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엔비디아 주식이 하나도 없는 나로선 천정부지로 오르는 그 회사의 주가보다 황 CEO가 날씨와 상관없이 가죽 재킷만 줄창 입고 다니는 이유가 더 궁금하다. 구글에서 그의 가죽 재킷을 검색하자 스타들이 입은 가죽 재킷을 본떠서 파는 쇼핑몰이 나온다. 제임스 딘, 말런 브랜도, 해리슨 포드와 나란히 황 CEO가 있었다. 가격은 149.99달러. 그 쇼핑몰에서 기업인이라곤 그 하나뿐이었다. 창업자나 경영인의 옷차림이 비교적 자유스러운 실리콘밸리에서도 가죽 재킷은 찾아보기 어렵다. 멋스러울진 몰라도 편한 옷은 아니니까. 무겁고, 빳빳하고, 바람도 안 통하니 일하는 사람이 입는 옷으론 영 별로다. “죽어라 일을 한다”고 알려진 황 CEO가 굳이 작업복으로 어울리지 않는 가죽 재킷을 고집한다는 게 영 이상하다.
뉴욕타임스는 황 CEO의 가죽 재킷을 두고 “독립심, 개방성, 반항, 섹스어필과 연결지을 수 있다”고 했다. 섹스어필은 지극히 개인적 취향의 영역이기 때문에 제쳐두자면, 독립심이나 반항과 같은 표현은 최근 테크계의 록스타 반열에 오른 황 CEO와 대체로 잘 들어맞는다. 우연이 아니다. 그는 원대한 계획을 갖고 가죽 재킷을 입고 다녔을 것이다.
실리콘밸리는 2020년대 전까지 ‘백인 남성의 골짜기’ 혹은 ‘보이스 클럽’으로 불렸다. 2015년 미국의 한 시민단체가 낸 실리콘밸리 관련 보고서에는 “아시아인들로 꽉 찬 구내식당 말고 임원 사무실이 있는 층에 가 보면 문제가 뭔지 알 수 있을 것”이란 표현이 나온다. 당시 구글, 야후, 인텔, 휼렛패커드, 링크트인에서 기술직으로 일하는 아시아계의 비중은 27%였지만 임원급은 14%에 불과했다. 고학력이어도 아시아계는 하위 기술직에 머무는 게 현실이었다.
2004년에 나온 ‘해롤드 앤 쿠마 화이트캐슬에 가다’란 미국 영화의 주인공 해롤드는 한국계 미국 청년이다. 해롤드는 똑똑하고 성실하지만 같은 회사의 백인 동료들은 매번 그에게 일을 미룬다. 순종적이고 소심한 그는 체념한 듯 남의 일감을 받아들인다. 아시아계에 대한 인종적 편견을 비꼬면서, 아시아계가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만약 황 CEO가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의 상징인 이세이 미야케의 검정 터틀넥이나 마크 저커버그 메타 창업자가 즐겨 입은 브루넬로 쿠치넬리의 반팔 티셔츠를 입었다면 어땠을까. 좋은 대학을 나오고 일도 열심히 하지만 중간 관리자 이상은 되기 힘들어 보이는 해롤드와 비슷한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속으로는 땀띠가 나도록 더울지라도 가죽 재킷을 고집한 것은 ‘나는 고분고분하고 만만한 아시아계 공돌이가 아니다’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가죽 재킷은 그에게 패션이 아니라 실리콘밸리에서 창업자이자 리더로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모이는 곳엔 주류(主流)가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성장하는 공동체의 주류는 끊임없이 바뀐다.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MS)의 CEO는 인도계이고, 애플과 오픈AI의 CEO는 성소수자다. 엔비디아의 뒤를 쫓는 AMD의 리사 수 CEO는 아시아계 여성이다. 실리콘밸리에 여전히 세계의 부와 기술이 몰리는 게 이해가 간다. 황 CEO가 가죽 재킷 때문에 얼마나 덥고 갑갑했을지 그 고통을 헤아릴 순 없지만, 그의 가죽 재킷은 실리콘밸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 제대로 한몫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