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오후 1시쯤 행주나루터 선착장 근처에 시신이 떠 있다는 신고가 경찰에 접수됐다. 조사 결과, 서울 금호동의 한 고시원에서 혼자 살던 61세 남성이었다. 5㎏ 아령이 팔에 신발끈으로 묶여 있었다. 건강을 위해 제작된 물건. 필시 미래의 힘을 기르려 애써 들어 올리곤 했을 그 무게는 이제 산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이 죽음에 대해 어쭙잖은 감상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여러 질환을 앓던 남자의 월 20만원짜리 고시원에는 현금 10만원이 담긴 봉투와 ‘청소비로 써달라’는 메모가 놓여 있었다.
갈림길에서 모든 선택은 극단적일 수 밖에 없다. 언론중재위원회는 5월부터 자살 사건 보도 시 제목에 ‘극단적 선택’을 사용할 경우 시정을 권고하기로 했다. 자살의 완곡 어법, 그 표현이 되레 자살을 ‘선택 가능한 대안 중 하나’로 인식하게 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 우려에 전부 동의하지는 않는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지적처럼 모든 자살이 사회적 타살이라 해도, 벼랑 쪽으로 걸어간 이상 선택의 몫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러나 단 한 명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이 단어를 포기할 것이다.
조금 태어나고 더 많이 죽는다. 다사사회(多死社會)에 진입했다. 이미 대한민국의 자살률은 세계 최고다. 지난 6일 보건복지부가 최신 통계를 보고했다.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자살한 사람이 6375명이었다. 전년 동기보다 10.1% 늘어난 수치다. 지난해 사망한 사람이 35만2700명이었다. 그중 자살자가 1만3770명이다. 매일 38명꼴로 목숨을 끊었다. 사회적 고립과 경제난, 우울·불안 증가…. 새 생명을 잉태하는 일만큼이나 산 사람을 살리는 대책이 시급하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소멸할 것이다.
정부가 분석한 자살 증가 원인 중 하나가 ‘모방 자살’이었다. 지난해 말 배우 이선균씨의 사망 사건 이후 7~8주간 자살 사망자가 늘었다고 했다. 그가 죽고 얼마 뒤 그의 대표작 ‘나의 아저씨’ 촬영지였던 용산 백빈건널목에 가본 적이 있다. 집으로 향하는 길목, 이선균을 포함한 극중 소시민들이 술 취해 쓰러지고 증오하고 다시 서로를 끌어안던 장소. 서울에 몇 안 남은 이 철길 건널목에 열차가 진입할 때마다 ‘땡땡’ 경고음과 함께 통행을 가로막는 차단봉이 내려온다. 자세히 보면 거기에 작게 ‘갇혔을 때 돌파하세요’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돌파하세요. 괜찮으니까 차단봉은 그냥 부숴버리세요.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은 살아남으세요.
누구나 한 번은 갇힐 수 있다. ‘갇힘 사고’라고 한다. 너무 느려서 혹은 무리하다가 오도 가도 못하게 돼버린 인생의 순간. 열차는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다. 작은 글씨로는 부족하다. 돌파하라고 큰 소리로 외쳐줘야 한다. 타고 있는 차량이 박살 나든 기물이 망가지든 일단은 밖으로 빠져나오라고, 삶의 의지에 기반한 극단적 선택을 추동하는 것, 나는 이것이 자살의 시대에 언론이 해낼 수 있는 ‘선택 가능한 대안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로 인해 죽을 수 있다면 누군가로 인해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갈림길에서, 바라건대 모든 선택이 언제나 삶 쪽을 향하기를. 무거운 아령은 내려놓고 신발끈을 신발에 다시 묶고 집으로 걸어가기를. 극심한 좌절 속에서도 청소비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계속 말해줘야 한다. 그런 건 염려하지 말라고, 살아있는 한 돕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