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별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팀 월즈 미국 미네소타 주지사가 지난주 해리스 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된 뒤 쏟아진 보도 중에 민주당 대선 캠프에서 선보인 홍보용 모자가 순식간에 매진됐다는 소식이 있었다. 캠프는 국방색 카무플라주(위장용 얼룩무늬) 바탕에 해리스·월즈의 이름을 오렌지색으로 프린트한 야구 모자를 웹사이트에서 40달러에 판매했다. 30분 만에 100만달러(약 13억7000만원) 매출을 올리며 ‘완판’됐다고 한다. 주문은 총 3000건이었지만 모자를 사면서 기부금을 추가로 결제한 구매자가 많아 금액이 커진 것으로 보인다.
작은 물건에 작지 않은 의미가 담기기도 한다는 걸 이 모자가 보여준다. 군인의 색이자 사냥꾼의 색인 카무플라주는 주방위군에서 복무하며 평생 사냥을 즐긴 월즈의 색이다. 주황도 오인 사격 방지를 위해 사냥용 의류에 넣는 색이다. 헌터스 오렌지(hunter’s orange)라고 한다. 자신의 상대인 공화당 부통령 후보 J D 밴스 상원의원을 두고 “그가 나처럼 꿩을 쏠 수 없을 거라고 장담한다”고 했던 월즈에게 딱 맞는 색 조합이다. 똑같이 중서부 시골 출신인 밴스가 아이비리그 로스쿨을 나와 실리콘밸리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월즈는 꿩을 쏘았다. 군인 출신, 시골 아저씨, 보통의 삶이라는 코드가 모자에 녹아 있다. 그게 억지스러워 보이지 않는 건 선거용으로 급조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월즈는 주지사로 활동하면서 카무플라주 모자를 즐겨 썼고 러닝메이트 자리를 제안한 해리스 부통령의 전화를 받을 때도 쓰고 있었다.
소셜미디어에선 1998년생 레즈비언 싱어송라이터 채플 론이 소환됐다. 역시 중서부 미주리 출신인 론이 ‘MIDWEST PRINCESS(중서부 공주)’ 문구를 오렌지색으로 넣은 카무플라주 모자를 굿즈(기념품)로 판매하기 때문이다. 이를 오마주한 월즈의 모자는 중서부라는 뿌리, 그리고 청년·성소수자·소셜미디어에 포용적인 태도를 암시한다.
모자 하면 떠오르는 정치인은 트럼프였다. ‘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을 수놓은 빨간 모자는 2016년 대선 때부터 그의 분신이었다. 트럼프처럼 모자도 직설적이다. 선거 구호를 이마에 써붙이고 다니도록 만든 게 디자인의 전부다. 그 구호는 1980년 대선에서 레이건이 이미 썼던 것이지만 트럼프는 수사(修辭)의 힘을 자기 것으로 활용한다. 강력한 구호는 더 이상 미국이 위대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좌절감을 효과적으로 타격한다. 모자에 ‘기호 1번 트럼프’라고 적었다면 캠페인 효과는 반감됐을 것이다. 트럼프의 모자는 섬세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무감각하지도 않다.
한국에서 선거 상징물이 호소력 있는 디자인으로 화제가 됐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기억나는 것이라곤 후보자와 선거운동원들이 명함 나눠줄 때 입는 ‘선거복’뿐이다. 기호와 후보 이름만 최대한 크게 써놓은 합성섬유 재킷을 보면 악 쓰는 사람을 만난 기분이 든다. 후보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왔고 무엇을 지향하는지 드러내는 것은 그 옷을 입는 이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선거법 규정을 비롯한 제약이 있겠지만 상상력을 발휘하면 주어진 조건 안에서도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창의적 디자인을 기대하는 건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어떤 상상력도 느껴지지 않는 선거복이 우리 선거의 현주소다. 후보자는 미래를 고민할 필요가 없고, 유권자는 그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알 필요가 없는 선거. 오직 중요한 것은 어느 편이냐는 물음뿐이다. 우리 정치가 후진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빈약한 상상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