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날 아파트 베란다에서 보름달을 본 아이는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부터 찍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작년에 처음 사주면서 전화 걸고 받는 법만 알려줬는데도 ‘모바일 네이티브’ 세대답게 손놀림이 제법 능숙했다. 이튿날엔 친구들과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놀이터에서 만날 약속을 잡았다. 비록 어른의 허락을 받아야 ‘효력’이 발생하는 약속이라 해도, 아파트 놀이터에도 아직 혼자서는 내보내지 않는 아이가 스스로 약속을 잡는다.
스마트폰 쓰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아이가 낯설다고 느낀다. 이제 다 컸다는 대견함과는 다르다. 아이가 품 안에서 떠나가고 있다는 아쉬움도 아니다. 마뜩잖은 그 느낌에는 손바닥만 한 저 물건이 부모·친구 아닌 누구와 언제 어떻게 연결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섞여 있다. 제일 싼 저가형에 구입할 때 이미 나온 지 몇 년이 지난 구형이었다 해도, 인터넷을 차단하고 전화·문자 기능만 남겼다 해도 스마트폰이다. 이미 아이의 스마트폰에도 온갖 특수 문자를 남발하는 ‘국제 발신’ 스팸 메시지가 심심찮게 온다. 즉시 지워버려야 한다고 다짐을 놓으면서도 무력감을 느낀다. 그런 것이 올 수 있다면 다른 것도 올 수 있을 것이다. 연결된다는 것은 가능성이면서 두려움이다.
소셜미디어를 비롯한 플랫폼 업체들이 사용자 정보를 광범위하게 수집해 더 중독적인 서비스를 만드는 데 활용해온 사실이 지난주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 보고서를 통해 드러났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거라고 짐작해왔던 내용인데도 섬뜩하다. 호주는 술·담배처럼 소셜미디어도 사용 연령을 제한하기로 했다. 미국과 유럽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소셜미디어의 중독성과 위험성에 대해서는 이제 공감대를 이루고 대책을 마련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스마트폰은 어떤가. 소셜미디어도 스마트폰에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플랫폼의 플랫폼’이라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을 너무 어린 아이들이 너무 오래 사용한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소셜미디어 제한을 주도하는 서구권과 한국의 사정이 다른 것도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방문연구원으로 미국에서 지낸 1년 동안 아이가 다녔던 초등학교의 학생들이 자기 스마트폰 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반면 귀국하고 아이를 한국 초등학교에 보낼 때 가장 먼저 준비한 것이 스마트폰이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이곳저곳 학원을 오가는 아이와 연락을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방과(放課)와 퇴근(退勤) 사이는 멀다. 그동안 부모와 아이를 이어 주는 가느다란 끈이 스마트폰인 것이다. 스마트폰은 비슷한 또래 아이가 있는 친구들의 공통된 고민이기도 하다.
모바일 세계의 이면에 아이들이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한국은 서구 국가들보다 훨씬 비상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초등학생 스마트폰 사용 금지’ 같은 것은 대책이 될 수 없다. 어려서부터 쓸 수밖에 없는 환경이 핵심이며, 그 환경은 교육·노동·복지 같은 여러 문제가 얽혀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낳으면 300만원’ 같은 단견으로 저출생 문제를 풀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저출생은 그것이 위기라는 문제 의식이라도 있지만 어린이들의 스마트폰 남용에 대해선 그조차도 희박하다.
전화에 대한 오래된 기억 중 하나는 어려서 옆집 찾는 전화가 우리 집으로 걸려 오면 전화 없는 그 집에 알려주러 심부름 가던 일이다. 중고생 시절엔 어쩌다 친구 집에 전화했는데 부모님이 받으시면 괜히 긴장하곤 했다. 그랬던 시절에서 스마트폰이 책가방과 학용품 못지않은 초등생의 필수품이 되기까지 한 세대밖에 걸리지 않았다. 너무 빨리 달려오느라 너무 멀리 와 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