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고향인 광주의 현실을 다룬 책을 내고 나니 관련된 강연 의뢰가 들어오곤 한다. 그중 하나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다. 최근 강연 준비를 하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5·18의 관계를 다시 되돌아보게 됐다. 1980년대 김 전 대통령과 5·18의 관계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1983년 5·18 3주기에 맞춰 시작된 김 전 대통령의 단식 투쟁은 정치권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불을 붙였다. 이듬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는 5·18 4주기에 맞춰 결성됐다. 취임 첫해 특별 담화에서 “문민정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면서, 국가적으로 기념해야 할 사건으로 만든 건 과거 정치적 실천의 결과였다.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에 생경함을 느낀 건 후배 세대의 한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원인도 있다. 2010년대 후반 현직 국회의원까지 폄훼 발언을 할 정도로 극단적인 세력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생긴 보수 정치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잊을 만하면 어느 공직자나 공직 후보자의 망언이 파문을 일으키곤 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보수 내부에서 자신들이 민주화에 어떻게 이바지했는지를 기억하거나 되새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롯해 보수 정치의 주축을 이루는 인물과 세력이 1980년 5월 광주 시민을 기억하고 그들의 뜻을 이어받아 민주화 투쟁에 나섰지만 이를 기념하고, 계승해야 할 전통으로 삼는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 듯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보수 정치의 정체성을 어디서 찾을 것인지는 중요해졌지만, 보수가 계승해야 할 전통에서 기라성 같은 선배 정치인이 민주화를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강조하는 이는 드물다. 제3자 입장에서 과거의 나쁜 인상을 지울 긍정적인 메시지를 받지 못하는 양상인 셈이다.

대한민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하고 선진국에 진입했다는 것은, 그 과정에서 일종의 ‘컨센서스(합의)’가 만들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확고한 대의 민주주의 원칙이나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추구하는 경제·사회 정책이 대표적이다. 1987년 이후 우리 사회와 정치권이 갈등과 협력을 통해 만든 성과다. 하지만 보수 정치에서는 자신들이 한국의 ‘지금’을 만드는 데 얼마나 이바지했는지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민주화뿐만 아니라 중산층 육성이나 경제 개혁도 마찬가지다. 중산층 육성은 1987년 정부가 직접 장기 계획을 입안해 실행에 옮겼을 정도로 보수의 핵심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중산층은 모호한 개념이지만 누구나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고, 삶을 개선할 기회를 가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중진국 대열에 접어들면서 본격화된 삶의 질 개선에 대한 욕구와, 재분배 정책에 대한 요구를 함께 겨냥한 것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보통 사람들의 시대’는 적극적 경제·사회 정책을 함축하는 슬로건이었던 셈이다.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성공은 안정된 변화를 바라는 서울의 화이트칼라, 부산·울산·경남의 블루칼라 중산층의 지지 덕분이었다.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말이 함축하듯, 무엇을 기념하고 전통으로 삼을지는 과거가 아닌 현재의 문제다. 정체성의 핵심인 과거에 대한 집단 기억에 있기 때문이다. 김 전 대통령이 1983년 단식 투쟁에 나서면서 자필로 작성한 선언문을 보면서 왜 보수는 이렇게 훌륭한 과거를 자신들의 전통으로 삼으려 하지 않는지 안타까운 심정이 들었다. 지금은 이승만, 박정희 못지않게 ‘오늘날의 한국’을 만든 김영삼이나 노태우의 유산을 재평가할 때가 아닐까. 민주당이 김대중, 노무현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계승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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