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안악군 안악면 판팔리. 일확천금을 꿈꾸며 가슴에 새겼던 주소다. 26년 전,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소 떼를 끌고 판문점을 넘어 북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TV로 하염없이 바라보던 외할머니가 돌연 내게 속삭였다. “할마이가 6·25 피란 나올 때 금덩이를 마당에 왕창 파묻고 왔으니까니 통일되면 꼭 찾으러 가보러 마.” 실은 파묻은 게 황금빛 놋그릇 더미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 외가 뿌리인 안악엔 안악 3호분 같은 고구려 벽화고분을 비롯해 문화유산이 산재한 터라, 외할머니의 속삭임은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주인공처럼 언젠가 저 땅에 가서 보물 탐사를 해보리라는 꿈을 심어줬다.

안악(安岳). 천석꾼은 함부로 이름도 못 내민다는, 재령평야 자락의 풍요로운 마을. 교육열도 남달랐던 안악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산실이었다. 조선일보 안악 지국을 경영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에 힘쓴 장해평 선생, 안악의 3·1 만세 운동을 주동했고 한국광복군 창립에 기여한 김기형 선생 등 숱한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105인 사건’의 발단이 되는 ‘안악 사건’도 여기서 벌어졌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우리 강토 13도마다 안악 같은 고을이 하나씩만 생겨도 이 나라의 문명은 10년 안에 일본을 따라잡게 될 것”이라고 안악을 극찬했다.

6·25전쟁이 터졌을 때 외할머니는 열일곱 소녀였다. 해맑고 철없던 안악 최가네 막내딸 팔자는 전쟁이 헤집어놨다. 아버지·삼촌·오빠 가릴 것 없이 집안 남자들이 전쟁 통에 증발해 버렸고, 언니도 넷이나 죽었다. 외할머니의 황금빛 청춘은 그렇게 도둑맞았고, 어렵사리 피란 온 부산에서 최씨 여자들끼리 밑바닥부터 기어 올라왔다. 기구한 삶이었지만 어깨만큼은 당당하게 펴고 산 것은 “이래 봬도 안악 출신”이라는 뿌리에 대한 자부심 덕분이다. 서울 아파트촌에서 나고 자라 이렇다 할 고향이 없는 나로서는 내 몸의 반쪽이 북에서 왔다는 사실이 신비로웠고, 안악의 후손답게 당차게 살아야 한다는 사명감까지 선사받았다.

외할머니는 환갑 무렵 고향이 그립다면서 38선 윗동네로 이사했다. 북한 땅이 눈앞에 보이는 강원도 고성군의 실향민 마을로 간 것이다. 거기서 30여 년을 기다렸지만 분단은 공고했고, 당신만 쇠약해져서 지난달 맏아들네로 거처를 옮겼다. 평소 할머니가 ‘나라 지키는 고마운 소리’라던 22사단의 포대 훈련을 배경음악 삼아 이삿짐 싸기를 돕다가 나는 분해서 울어버렸다. 죽기 전 고향에 한 번만 다시 가보고 싶다는 할머니의 소원은 끝내 응답받지 못했다.

북한 김씨 정권은 한국 드라마 본 죄로 미성년자를 공개 총살하더니 남북을 잇던 도로와 철길을 완전히 끊고, 온갖 문서에서 ‘통일’을 지워버리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물 풍선과 핵으로 도발하는 일도 잊지 않는다. 북한이 이 더러운 풍선을 한가득 날려 보낼 때마다, 김씨 일가는 X 덩어리만도 못하다는 실상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다.

안악이 그랬듯 이북 너머의 저 땅에도 본디 자유와 풍요의 기운이 넘쳐흘렀다. 다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후부터 그러지 못했을 뿐이다. 한반도와 한민족이 하나인 것은 지극히 당연해서, 우리 헌법 3조와 4조를 애써 거론할 필요도 없다. 남북이 ‘적대적 두 국가’라는 김정은 남매의 협박은 국제 정세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졸망스럽기 그지없는 발악일 따름이다.

임종석씨가 “통일하지 말자”고 김정은을 거들고 나섰다. 누구 좋으라고 통일을 가로막나. 내 할머니가 살아서 고향에 못간다면 나라도 가서 한풀이하려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남북의 통일과 평화는 김씨 일가가 사라져야 온다. “김정은 물러나라”고 함께 외치지 못할 거라면, 임종석씨는 그 입 다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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