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않았는데 조화(弔花)를 보낸다. 유행이라면 유행이다.
서울 성수동 SM엔터테인먼트 앞에 근조 화환 1000개가 놓였다. 인기 아이돌 그룹 라이즈 멤버 홍승한(21)씨의 탈퇴를 요구하며 지난달 11일 팬들이 보낸 것이다. 사생활 문제 잡음으로 잠시 활동을 중단했던 홍씨가 1년 만에 복귀를 발표하자 이를 반대하는 집단행동이었다. 화환 1개당 대략 국화 100송이가 꽂힌다. 일대 꽃집에서 국화 품귀 현상이 빚어질 정도였다. 한밤의 빌딩숲 일대가 일순 빈소(殯所)로 뒤바뀌는 가장 한국적인 장관. 한 영국인 팬은 “근조 화환은 본래 죽음을 경건하게 애도하는 표시 아니냐”며 “존중의 문화가 누군가를 괴롭히는 전술로 사용되는 상황이 끔찍하다”고 미국 NBC뉴스에 말했다.
고인(故人)에게 바치는 꽃, 실력 행사의 수단이 돼가고 있다. 지난 4일에는 경기도 분당의 네이버 본사 앞에 근조 화환 10개가 배달됐다. 연재 중인 네이버 웹툰 ‘이세계 퐁퐁남’이 여성 혐오적 색채가 짙다고 주장하는 일부 네티즌이 벌인 일이었다. 인도 위에 조화와 검은 리본이 나부끼는 살풍경. 네이버 맞은편은 주택가이고, 바로 옆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다. 지난봄에는 보건복지부(의대 증원 반대), 여름에는 대한축구협회(홍명보 감독 선임 반대) 등에 근조 화환이 대거 배달됐다. 법원, 방송국, 시청 등 거의 모든 이슈의 장소마다 근조 화환이 놓인다. 아무도 죽지 않았는데 “죽었다”는 선언만 넘쳐난다.
근조 화환은 가성비 좋은 소품이다. 어떤 가치의 상실을 강조하고, 눈길도 확실히 끌어준다. 개당 5만원 수준에 당일 무료 배송·설치까지 해준다. 법적으로도 떳떳해졌다. 지난해에는 지방선거 당시 도지사 후보들을 비방하는 내용의 근조 화환 50여 개를 설치한 시민 단체 대표가 무죄를 선고받았다. 선거 기간 화환 설치를 금지하는 선거법 조항도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한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정을 받았다. 이제는 화가 나면 그냥 근조 화환을 보낸다. 물량 공세를 통한 세(勢) 대결 양상까지 띠고 있다. 경찰 측에서도 근조 화환을 집회 용품으로 간주할 정도다.
시위 도구가 돼버린 죽음의 메타포. 컴컴한 바깥에 소복 입은 귀신마냥 서있는 일련의 근조 화환을 보자면, 일부러 밤중에 국화를 감상했다는 다산 정약용의 일화를 떠올리게 된다. “촛불을 밝혔더니 기이한 무늬와 형체가 순식간에 벽면 가득히 나타났다… 윤이서(친척)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발을 구르고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기이하고 기이하네. 천하에 다시 없는 광경일세(여유당전서).” 국화가 아닌 국화 그림자를 관찰하는 일은 그러므로 필요할 것이다. 기이한 풍경을 골똘히 살피다 보면, 거기서 의외의 순간이 드러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경기 성남시 서현초등학교 앞에 100개 넘는 근조 화환이 늘어섰다. 학부모 및 인근 주민들이 주문한 것이었다. 심각한 학교 폭력이 일어났다. 6학년 여학생 한 명을 동급생 다섯 명이 괴롭힌 사건. 모래 섞인 과자를 먹으라고도 했다고 한다. 50m 정도의 통학로를 흰 국화가 뒤덮었다. 처벌과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교육 당국을 향한 충격 요법이었다. 다만 학부모들은 다음과 같은 주의 사항을 서로 공유했다고 한다. “근조 리본에 욕설, 과도한 비방 절대 금지. 초등학생이 보고 있으므로 응원의 말, 절제된 문구 쓰기.” 근엄할수록 목소리는 더 오래 살아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