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출해서 생라면을 부숴 먹을 때 불쑥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지난해 여름, 병원 출근길에 교통사고로 별세한 고(故) 주석중 서울아산병원 흉부외과 교수. 산더미 같은 라면 스프가 그의 연구실 책상 주변에 쌓여있던 사진이 워낙 강렬해서, 일면식도 없는 분인데 라면 스프를 만지작거릴 때마다 생각이 난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응급 심장 질환자의 생명을 그가 밥 먹을 시간의 분초(分秒)까지 바쳐서 지켜냈노라고, 대한민국 필수 의료인의 삶은 저렇게나 고된 것이라고, 주인을 잃은 라면 스프들이 증언했다.
환갑의 의사가 생라면 덩어리를 삼켜가며 매일같이 저승사자와 결투를 벌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환자의 생명을 살렸다는 기쁨과 긍지, 요컨대 의사들이 일컫는 ‘바이탈 뽕’의 위력 덕분일 것이다. 그래서 작금의 의정 갈등이 어찌저찌 끝난다 하더라도 응급실과 수술실이 전과 같은 에너지를 되찾을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로 불리는 필수 의료진 충원을 성적 경쟁에서 밀린 의대생들의 낙수효과로 해보겠다는 안이한 발상이 그들의 바이탈 뽕을 모욕적으로 해독시켰기 때문이다.
하물며 ‘과학자 뽕’은 최상위권 이과 학생들이 의대로 쏠리는 입시 광풍 속에서 휘발된 지 오래다. 서울 강남에 치과를 개원한 지인의 원래 꿈은 한국인 최초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되는 거였다. 그 꿈을 위해 서울과학고를 조기 졸업하고 서울대 공대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는데 “공부 머리가 아깝다”는 주변 잔소리에 시달리다 결국 치의학전문대학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처럼 과학고나 공대 졸업장이 의술의 보증서처럼 동네 병원에 전시되는 경우가 갈수록 흔해진다. 3음절짜리 뽕 해독제 ‘아/깝/다’와 맞물린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은 공대생들을 수능 시험장으로 등 떠밀고 있다.
‘K’의 이름으로 세계에서 환영받는 오늘날 한국의 위상은, 다채롭기 그지없던 ‘K뽕’이 각계에서 누적된 결실이다. ‘잘살아보세’ 뽕은 나라의 기간산업을 농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격상시켰고,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뽕은 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겁 없이 개척하며 반도체·자동차·철강 등을 내다팔 힘을 줬다. 행시 공무원은 나라 시스템을 디자인한다는 뽕에, 외교관은 한반도의 통일과 번영에 기여한다는 뽕에, 교사는 나라의 미래를 길러낸다는 뽕에, 군인과 경찰은 안전한 나라를 만든다는 뽕에, 부부는 아이가 인생의 가장 값진 선물이라는 뽕에 취해 살았다. 그러나 IMF 위기를 겪으며 돈 냄새가 뽕맛을 압도하고, 진짜 마약이 만연한 사회가 됐다. 돈 많이 버는 순으로 장래 희망이 서열화되는 나라에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보람’ 따위의 말은 무력하다.
미국인들이 도널드 트럼프를 다시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8년 전부터 나부끼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Make America Great Again)’ 슬로건은 펜타닐만큼 강력해서, 트럼프가 그 많은 구설에도 세계 최강국의 지도자로 두 번이나 낙점받게 했다. 치솟는 물가와 흔들리는 치안, 인공지능(AI)의 대두, 중동과 유럽의 전쟁 등 격변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시대를 ‘MAGA 뽕’에 취해 돌파해 나가겠다는 미국인들의 의지가 이번 대선 결과에 담겼다.
한국 사회가 상하좌우로 갈래갈래 찢어져 뒷걸음치는데, K정치인들은 서로 싸우기 바쁘다. 여권은 아직도 검찰 드라마 촬영 중이고, 야권은 방탄과 탄핵의 악다구니를 쏟아낸다. 그 사이 복잡성과 변동성으로 직조된 새로운 세계가 당도했다. 전인미답 변화의 물결을 이겨내려면, 뽕의 힘이라도 빌려 헤쳐 나가는게 급선무다. 대내외 리스크를 아우르는 안목과 시대정신, 보통 사람다운 윤리의식을 한 스푼씩 섞은 K뽕 제조업자가 이 땅에 다시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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