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지역은 전라도 사람이 많이 살아서 표를 얻을 수 없어요.”
선거 때 수도권에 출마한 보수정당 사람들을 만나면 ‘전라도’라는 고유명사를 듣는 경험을 할 때가 종종 있다. 어떤 곳이 강고한 민주당 표밭인 이유를 설명하려 할 때다. 거꾸로 누군가 얼마나 선거 캠페인을 잘하고 있는지 묘사할 때 ‘호남 향우회의 지지까지 얻었다’라는 말이 관용어처럼 쓰이곤 한다.
전라도 사람이 많이 산다는 지역을 보면 대개 다가구·다세대 주택이 빼곡한 구도심이다. 현장을 둘러보면 보수 지지가 약한 건 특정 지역 출신이 많아서가 아니라, 노동자나 영세 자영업자 등 중하층이 지지하지 않아서라는 게 진실에 가까워 보이곤 했다. 시흥, 안산 같은 도시는 6·25 전쟁에 북에서 넘어온 실향민, 서해안 물길을 따라 이주한 충청도 사람, 서울에 있던 공장이 내려오면서 따라온 전라도 사람이 섞여 만들어졌다. 한국갤럽의 2022년 조사 자료를 보면 인천·경기도 유권자의 원적지 분포는 광주·전라(19.9%)가 가장 많지만, 대전·충청(18.3%)도 그 못지않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압승하자 민주당 지지자들은 ‘멘붕(멘털 붕괴)’이 역력하고, 국민의힘 지지자는 화색을 감추지 못한다. 인종을 가리지 않고 경제적 약자들이 트럼프를 지지한 모습이 한국에서도 재연될 수 있다는 기대에서다. 2019년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논란을 계기로 민주당이 기득권인 상위 중산층의 정당인 것이 드러난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가구·다세대 주택이나 임대 아파트에 사는 ‘전라도’ 사람들이 지금의 보수를 대안으로 삼을지 의문이 든다. 갤럽이 총선 직후 실시한 여론조사만 비교해도 그렇다. 블루칼라의 보수 정당 지지율은 2016년 30%에서 올해 19%로 내려갔다. 계층 지위가 ‘하’인 사람의 지지율은 40%에서 30%로 꺾였다. 자산이나 소득이 없을수록 보수 정당을 찍지 않는 경향이 뚜렷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슬로건 이후 보수에서 분배, 노동, 복지 담론이 10년 넘게 없다시피 한 결과다.
새로운 보수를 도모해 보겠다고 나선 사람들에 대한 주된 지지 세력도 경제적 승자다. 2017년 대선에서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의 지지율은 각각 월 소득 700만원 이상, 자산 5억원 이상에서 가장 높았다(동아시아연구원·한국리서치 조사). 지난 총선 개혁신당 비례대표 득표율이 높은 지역을 추려보면 서울 강남구·서초구·송파구, 경기 성남시 분당구, 대구 수성구 등 한결같이 부촌이다. ‘따뜻한 보수’를 외치지만, 노골적인 시혜적 태도에다가 실질적인 정책을 찾기 어려운 정치 세력에 유권자가 일체감을 느낄 리 만무하다.
사실 민주당도 서울 바깥의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전라도나 충청도에서 이주한 중하층 노동계급, 그리고 그들의 계층 지위를 그대로 물려받은 자녀들을 계속 지지자 연합으로 끌고 가는 데 점점 힘에 부쳐한다. 안동 출신 이주민으로 서울 하층민이 이주해 만든 성남에서 자란 이재명 대표 이외 뚜렷한 대선 주자가 없고, 그나마 지난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이유다.
보수가 진짜 이재명식 정치를 청산하고 싶다면 법정만 보는 게 아니라 수도권에 사는 중하층 이주민들도 기꺼이 표를 던질 만한 정당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트럼프 정부의 신임 국무장관 마코 루비오만 해도 경제 정책의 목표는 노동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공공선 자본주의를 주장해 왔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 기업이 충분한 이윤을 재투자하도록 해야 한다는 논리다. 한국 보수도 평범한 사람들이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 자립할 수 있도록 국가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보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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