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페더러(왼쪽)와 라파엘 나달이 2008년 7월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전을 앞두고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한 모습. /AP 연합뉴스

테니스 영웅 라파엘 나달이 지난 20일 은퇴 경기를 치렀다. 2년 전 코트를 떠난 또 다른 전설 로저 페더러가 나달에게 편지를 써 공개했다. 두세 줄 덕담이겠거니 했는데 흰 종이 석 장을 채웠다. “네가 테니스에서 졸업할 준비가 됐으니, 내 감정이 북받치기 전에 너와 나눌 이야기가 몇 가지 있어”라며 시작된다. “너는 나를 이겼어. 많이. 내가 간신히 널 이긴 것보다 많이.”

스포츠 사상 최고의 라이벌 중 하나로 꼽히는 나달과 페더러는 총 40차례 맞대결했다. 나달이 24번, 페더러가 16번 이겼다. “넌 내게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도전해 왔어. (나달이 특히 강했던) 클레이 코트에선 너의 뒷마당에 들어선 기분이었어.” 편지는 페더러 자신의 선수 시절을 따라가는데, 곧 나달의 여정과 포개진다. 페더러는 첫 맞대결의 충격을 이렇게 회상한다. “2004년 처음 랭킹 1위를 달성했어. 세계 정상에 있다고 생각했지. 두 달 뒤 네가 빨간 민소매 셔츠를 입고 이두박근을 자랑하며 코트로 걸어왔을 때까지는. 넌 나를 확실하게 이겼어.”

페더러가 특히 강했던 잔디 코트와 나달의 강점이던 클레이 코트를 반반씩 섞어놓은 코트에서 치른 경기, 5만명 넘는 팬을 불러 모아 역대 관중 수 기록을 깼던 일…. 함께했던 추억을 하나씩 불러올 때 가장 뭉클했던 대목은 “코트에서 서로를 지치게 한 것, 그러고 나서 트로피 시상식이 진행되는 동안 거의 말 그대로 서로를 (쓰러지지 않도록) 떠받쳐야 했던 것”이었다. 나달은 경기 중 반드시 지키는 다양한 루틴으로 유명했는데 페더러는 “너무 독특하고 너다워서 그 모든 과정을 남몰래 좋아했다”고 털어놓았다. 페더러는 나달과 나란히 유럽팀 대표로 나섰던 자신의 은퇴 경기를 떠올렸다. “네가 라이벌이 아닌 복식 파트너로 곁에 있어준 것은 내게 무엇보다 중요했어. 그날 밤 너와 코트를 공유하며 함께 눈물 흘린 건 영원히 가장 특별한 순간 중 하나일 거야.”

페더러와 나달은 각각 1998년과 2001년 프로 데뷔했고, 그랜드슬램 우승을 페더러는 20회, 나달은 22회 달성했다.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 우아함과 투지 등 팬들이 좋아하는 요소를 두루 갖춘 눈부신 라이벌 관계였다. 서로를 꺾어야 우승 목표를 이룰 수 있었기에 선수 생활 내내 분석하고 약점을 파고들고 자신의 플레이에 변화를 주기도 했다. 만날 때마다 지쳐 나가떨어지도록 온 힘을 다해 맞섰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가 없었다면 도저히 이르기 어려웠을 수준까지 도달하게 됐다.

페더러는 고백한다. “너로 인해 나는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열심히 훈련하게 됐어. 너는 내 경기를 다시 생각해 보게 했어. 조금이라도 유리해지길 바라면서 내 라켓 헤드 크기까지 바꿨을 만큼. 너는 내가 경기를 훨씬 즐기도록 만들었어.” 나달도 페더러 은퇴 당시 “내 친구이자 라이벌에게. 이 날이 절대 오지 않기를 바랐어. 이 모든 세월을 너와 공유한 것은 기쁨이자 영광, 특권이었어”라고 했다. 서로 네트 반대편에 있었지만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들을 위해 싸우면서 코트를 공유했다”고 말했다.

나달 코치를 맡았던 그의 삼촌은 “페더러와 나달은 매우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이루면서도 동시에 존경심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줬다”고 했다. 단순히 상대를 밟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탁월함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과정에서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너의 오랜 친구가 언제나 널 응원하고 있고, 네가 다음에 하는 모든 일도 큰 소리로 응원할 것을 네가 알았으면 해. 너의 팬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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