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8년 차인 친구는 얼마 전 남편 얘기를 한참 했다. 성실하고 가정적이지만,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아이 친구의 어머니와 있었던 갈등을 얘기하면 자기 편에 서서 생각해주지도 않고, 애 낳고 찐 살을 걱정하면 “당신이 운동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지적부터 하는 식이다. 가족이라서, 가장이라서 믿고 의지하려고 꺼낸 얘기에 공감을 하나도 안 해주는 게 섭섭하단다. 친구는 “남편은 역시 ‘남의 편’의 준말이 맞고, 내 남편은 그중에서도 ‘티(T)발놈’인 것 같다”고 했다.

‘T발’이란 MBTI(인적성 분류)에 해당하는 T와 신문 지면에서는 쓸 수 없는 비속어를 합친 것이다. T에는 ‘이성적’이란 의미도 있지만 이런 욕설과 결합한 경우에는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부정적인 의미로도 쓰인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 앞에서 고개를 끄덕여주기는커녕 딴소리를 하면서 외면하면 “너 T발이지?”라는 타박을 들을 수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여러 논란에도 대선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T발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내세운 ‘아메리카 퍼스트’는 다른 나라가 뭐라든, 모든 문제에서 미국을 최우선으로 두고, 미국인과 미국 경제의 편을 철저하게 들겠다는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자국의 반도체 공급망을 되살려보겠다고 야당인 공화당 의원들까지 회의에 불러 모으며 칩스법(반도체지원법)을 밀어붙였다. 바이든도 야당도 아메리카 퍼스트 때문에 손을 잡은 셈이다. 미국에서는 T발스럽지 않아야 정치를 할 수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 퍼스트’를 미국 같은 강대국만 내세우는 것도 아니다. 최근 인도네시아는 애플이 자국 기술 산업에 투자를 충분히 안 했다는 이유로 아이폰 등 애플 제품의 수입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애플은 당장 투자액을 기존보다 열 배 늘렸다. 태국과 베트남도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테무, 알리익스프레스 등에 대한 규제를 대폭 강화했다.

요즘 국내 반도체나 인공지능 업계에서도 ‘T발’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지난 11일 발의된 반도체 특별법만 봐도 그럴 만하다. 이 법의 알맹이 조항인 주 52시간 예외 적용은 야당이 반대하고, 보조금 지급에 대해서는 기재부가 난색을 표했다. 만약 이런 알맹이가 빠진 채 법안이 통과된다면 업계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정부와 국회가 기업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국가 전략 산업과 미래 먹거리를 탄탄하게 키워내고 국내에서 고용과 투자를 늘리고자 하는 ‘코리아 퍼스트’를 보고 싶을 뿐이다.

국내 반도체 기업 임원은 “보조금도 주고 공장도 빨리 지어주는 일본에 공장을 세우고 싶다”고 했다. 일본의 반도체 정책 덕분에 대만 파운드리 기업인 TSMC는 구마모토에 2년 만에 공장을 짓고 투자금의 절반을 보조받았다. 그러자 TSMC는 일본에서 박사급 인재 채용에 나섰고 투자 규모도 늘리기로 했다. 일본의 반도체 정책은 TSMC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위한 ‘재팬 퍼스트’였다.

최근 외국계 투자 은행의 아시아기술투자총괄 임원이 일본에 갔다가 한국을 들렀다. 그를 만난 날 마이크로소프트가 도쿄에 아시아 인공지능(AI) 거점을 만든다는 기사가 나왔다. 오픈AI도 지난 4월 일본을 아시아·태평양 거점으로 정했다. 일본이 아시아 AI의 중심이 될 정도의 기술 역량을 갖고 있는지 물었더니 “일본 정부가 이런 기업들을 유치하려고 뒤에서 얼마나 뛰고 있는지 아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한국이 글로벌 AI 순위도 더 높고, 반도체 공급망도 훨씬 많이 갖췄는데 빅테크들이 왜 한국이 아니라 일본을 선택하는지는 정부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나온 대사가 떠오른다. “우리 사람은 못 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 ‘코리아 퍼스트’는 못 해도 ‘남의 편’은 되지 말자. 아니, ‘T발놈’은 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