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국에 걱정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신경 쓸 게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꼭 한마디 해야겠다면 그것은 자유다. 몇 마디 짧은 재치로 자신의 정파적 신념을 드러내거나, 문서 파일에 작성한 장문의 견해를 정성껏 퇴고하고 맞춤법 교열까지 끝낸 뒤 페이스북에 게시하는 행위 역시 전적으로 자유다. 그러나 쉽게 무시되는 사실이지만, 말하지 않을 자유 역시 엄연한 개인의 권리에 해당한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는 것만으로 속이 뒤집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뭐요.” 가수 임영웅에게서도 유사한 종류의 분노가 감지됐다. 누군가 인스타그램 채팅으로 “이 시국에 뭐하냐”고 시비를 걸었던 모양이다. “계엄령 내린 대통령 탄핵안을 두고 온 국민이 모여있는데 목소리 내주는 건 바라지도 않지만 정말 무신경하네요.” 무시하는 대신 임영웅은 대답했다. “제가 정치인인가요. 목소리를 왜 내요.” 이 대화가 소셜미디어에 퍼지며 세간이 들끓었다. 경기도 포천시에는 그의 홍보 대사 해촉을 요구하는 민원이 접수됐고, 모 평론가는 “한국인 자격이 없다고 봐야 한다”고까지 비난했다. 이 같은 거센 떼창의 이유는 기실 그의 침묵이 아니라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날 영화감독 봉준호 등 영화인 2000여 명이 ‘내란죄 현행범 윤석열을 파면·구속하라’는 긴급성명을 발표했다. “영화적 상상력을 동원해도 망상에 그칠 법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 것”이라며 “누구에게 정권을 맡길지는 국민들이 결정한다”는 자못 비장한 내용이었다. 굉장한 순발력으로 순식간에 세를 모았다. 나라 염려하는 마음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강동원·손예진 등도 성명에 이름을 올렸으나, 배우가 아닌 동명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우리가 익히 아는 배우 강동원과 손예진이 세상사에 아무 관심이 없어서 여기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다.

지난 21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왼쪽)와 탄핵 촉구 단체 행렬. /뉴시스

정치적 소요가 일상을 잠식한 나라, 국민이 반으로 쪼개져 매일같이 다퉜다. 갈등이 심해질수록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이들이 있다. 하이라이트가 연말에 터지자 기다렸다는듯 광화문과 여의도로 달려간다. 깃발을 치켜들고, 목청껏 노래 부르며, 응원봉을 흔들어댄다. 누구에게나 보장된 자유다. 표현의 자유와 집회·시위의 자유는 모두의 것이다. 민중가요를 예습하거나 시위용품을 구하려 중고 거래까지 활발해졌다고 한다. 뉴진스 응원봉이든 방탄소년단 응원봉이든, 그것은 선택의 문제일 뿐 옳고 그름의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함성이 커질수록 확성기 뒤편에서 개개인이 발휘하는 도저한 인내심은 무시되고 있다. “이 시국에”라는 말, 그러니 모두가 눈치를 살피며 비장하게 목청을 가다듬어야 마땅하다는 말이 득세할수록, “거리낌 없이 말하고 들릴 권리는 그와 유사한 침묵할 권리와 너무 멀리 떨어지면 의미를 잃는다”(영국 소설가 세라 메이틀런드 ‘침묵의 책’)는 지적은 너무 쉽게 밀려나고 있다. 반려견의 생일을 축하(임영웅)하거나, 자신의 화보 사진을 자랑(차은우)하는 모든 개인에 대한 공격이 정당화된다. “더 걱정스러운 점은 재앙을 기리는 방법이 침묵에서 박수갈채로 옮겨 간다는 것이다.”

혼란의 악다구니 속에서도 일상을 지켜내고 되찾으려는 갈망은 소중하다. 일상이야말로 이번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주식이 녹아내리고, 여행 예약이 줄취소되고, 송년회가 사라졌다. 경기 지표는 악화일로다. 이 시국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느라 떠들어댈 틈이 없다. 생활 전선을 추스르느라 최선을 다해 울분을 참는 사람들, 그들에게 굳이 한마디 들어야겠다면, 다문 입 대신 눈을 바라보라. 부릅뜨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