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이 끝나자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이 지명하는 인사 소식이 매일같이 쏟아진다. 관료, 교수보다 실리콘밸리 창업자나 투자자들이 많은 인사여서 테크부 기자들도 관심 갖고 보고 있다. 오는 이가 있다면 가는 이도 있는 법. 하지만 조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해 그가 임명한 부처의 수장들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이는 별로 없다. 트럼프 당선인의 취임식이 한 달도 안 남았으니 짐을 싸고 있거나 새 일자리를 찾아 나섰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아니면 연차 휴가라도 내지 않았을까.

다른 부처 장관은 몰라도 지나 러몬도 미 상무부 장관과 리나 칸 공정거래위원장(FTC)의 동태는 최근까지 뉴욕타임스(NYT)나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현지 언론에 오르내렸다. 두 부처 모두 바이든 정권에서 기술 관련 정책의 핵심을 다뤘다. 상무부는 미국 안에 반도체 공급망을 갖추기 위한 반도체법(Chips Act)을 실행했고, FTC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빅테크의 독과점을 해소하는 역할을 맡았다.

NYT 에 따르면 러몬도 장관을 비롯해 상무부 공직자들은 최근까지 야근과 주말 근무를 했다. 반도체법에 따라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한 기업들에 보조금을 주는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다. 반도체법에 부정적인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들어서면 이 기업들에 약속한 게 무산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대선 결과가 나오자마자 상무부는 보조금 확정을 위해서 전력을 동원했다고 한다. 러몬도 장관의 주말 근무 덕분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보조금을 확정받고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칸 위원장도 러몬도 장관처럼 직원들과 야근과 주말 근무를 했는데, 어떤 면에선 러몬도 장관보다 더 독하다. 지켜야 할 약속이나 계약이 있는것도 아닌데 임기 끝나기 전까지 일을 더 많이 해놓기 위해서 초과 근무를 했다. FTC는 지난달 마이크로소프트(MS)의 잠재적인 반(反)독점법 위반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시작하면서 수백 장 분량의 정보 요청서를 회사에 보냈다. 최근에는 구글·아마존·MS와 같은 빅테크들이 인공지능(AI) 스타트업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한 건에 대한 반독점 검토도 마쳤다. 칸 위원장은 마무리할 수 있는 독점 규제는 매듭을 짓고, 새로운 조사도 시작해 차기 정부를 압박하려는 것이다.

정권 교체와 퇴임을 한 달 앞둔 공직자의 야근이나 주말 근무는 한국에서 본 적 없는 모습이라 생경하다 못해 이상하게 느껴졌다. 러몬도 장관이 밤 새워서 마련한 반도체 보조금 때문에 정권이 바뀐 뒤 고초를 겪지는 않을지, 칸 위원장에게 혼나고 있는 빅테크 최고경영인(CEO)들이 이미 트럼프 당선인에게 줄을 섰는데 나중에 보복을 당하지 않을지 걱정마저 됐다. 하지만 바이든, 트럼프 1기, 버락 오바마 행정부를 쭉 거슬러 올라가 봐도 전임 행정부에서 ‘맡은 일,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했다’는 이유로 문제가 된 공직자는 없었다.

다른 정권에서 경제 수장을 한 원로 인사가 몇 달 전 공직자 후배들에게 “우리도 미국이나 일본처럼 산업 정책을 고려해야 할 때가 아니냐”고 물었더니 다들 고개를 저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산업 정책을 반대하거나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하나같이 “그런 걸 했다가 다음 정권에서 문제가 되면 어쩌려고 하느냐”고 반문했다는 것이다. 당시 탄핵 정국이 들어서기 전, 대통령 임기가 2년 이상 남아 있었을 때였다. 원로 인사는 “블랙리스트 파문 때의 트라우마가 공직 사회에 깊이 남아 있다”고 했다. 새로운 일에 손대지 않으려는 공직자만 탓하기도 어려운 문제다.

반도체 보조금 문제가 마무리됐을 무렵, 러몬도 장관이 WSJ와 한 인터뷰를 봤다. 그동안의 소회를 당당하게 밝히는 그는 사진에서 초연하면서도 뿌듯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떠나는 자의 마지막 모습이 어때야 하는지, 그 전범(典範)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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