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주문한 스웨터의 배송이 시작된 곳은 洛阳市(중국 뤄양시)였다. 배송 추적란에 적힌 간체자 한자가 눈에 설었다. 郑州市(정저우시)를 거쳐 중국 대륙을 가로지른 스웨터는 열흘 만에 도착했다. 이 브랜드 제품은 몇몇 한국 쇼핑몰에서도 수입해서 판매하지만 구색이나 가격에 차이가 있어 몇 차례 중국에 ‘직구’를 해오고 있다.

이곳의 디자인 콘셉트는 ‘아메카지’다. ‘아메리카’와 ‘캐주얼’을 합친 일본식 조어(造語). 미국의 옛 군복과 워크웨어(작업복) 따위에 바탕을 둔 캐주얼을 뜻한다. 이 브랜드는 그중에서도 복각(復刻)한 군복으로 유명하다. 제트기가 등장하던 1950년대 미 공군 조종사용으로 나온 MA-1 재킷(배우 윤여정이 입었던 ‘항공 재킷’과 같은 모델이다), 영화 ‘택시 드라이버’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입어 유명해진 전차병용 ‘탱크 재킷’처럼 밀리터리 패션의 고전이 된 옷들을 판다. 가격이 일본 유명 복각 브랜드의 3분의 1 수준인데 만듦새와 고증의 수준이 나쁘지 않아서 국내에도 팬들이 꽤 있다. 그들은 이 브랜드를 ‘대륙의 실수’라고 부른다. ‘메이드 인 차이나’ 옷은 많지만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

대륙의 실수라는 별명은 이제는 빅테크의 반열에 오른 샤오미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현대인의 필수품 스마트폰과 달리 아메카지는 소수의 취향일 뿐이다. 이 브랜드가 샤오미처럼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는 일은 아마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약간 묘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은 싸구려로만 알았던 중국제의 디자인과 품질이 만만찮아서가 아니다. 옷을 주문할 때마다 중국 어딘가에서 ‘적성국’ 미국의 스타일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장면이 떠오르는 것이다.

중국은 미국과 세계 패권을 다투는 경쟁자다. 열흘 뒤 출범할 ‘트럼프 2기’의 미국과 가장 첨예하게 부딪칠 것으로 전망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국가로서 중국과 미국이 대결하는 도중에도 중국의 누군가는 미국의 스타일과 문화를 파고든다. 자칭 “아메리칸 빈티지 스타일을 전문으로” 하는 브랜드라면 자기 제품이 뿌리를 두고 있는 20세기 초 미국의 철도 산업, 1930년대 아이비리그와 프레피, 2차 대전과 이후 미군의 변화상을 알아야 한다. 옷은 시대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고교 시절이었던 1962년 청소년 적십자 국제대회 한국 대표로 미국에 가서 만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지도자끼리 대화하지 않는 나라들도 국민은 서로 교류한다”고 연설했다고 한다. 당시는 냉전이 한창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냉전 종식 이후 한 세대 가까이 이어진 세계화의 시대가 끝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트럼프는 취임 첫날부터 불법 이민자를 대거 추방하고 국경 장벽 건설을 재개하겠다고 벼르는 중이다. 영국이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로 떨어져나간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반(反)이민을 내세운 극우 세력이 집권했거나 집권을 넘보고 있다.

1980년대 초반에 태어난 내 머릿속에 베를린 장벽 해체, 88 서울 올림픽, 소련의 붕괴 같은 냉전 종식의 상징적 장면들은 어렴풋하게만 남아 있다.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후의 세계사는 ‘지구촌’과 ‘글로벌’, ‘연결’이 화두로 떠오른 과정이다. 최근 각국에서 전해지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당연한 줄 알았던 그 흐름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단절의 시대로 돌아가게 될까? 당혹스럽지만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미 세계화를 경험한 이들이 국경을 뛰어넘어 취향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건너온 복각판 미 육군항공대 스웨터를 걸칠 때마다 작은 위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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