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워서 더 슬픈 것일까 슬퍼서 더 아름다운 것일까. 제주도에 갈 때마다 마음은 어지럽다. 그 섬의 참혹했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 다들 비슷할 것이다. 치유와 화해를 놓고 그러나 해법은 갈린다. 이른바 진보라는 사람들은 상처를 들쑤셔 슬픔을 극대화해놓고는 그것을 치유라고 부른다. 그리고 마치 그 일이 자신들의 역사라도 되는 양 독점하고 생색을 낸다. 보수는 알아서 죄인이다. 주눅이 들어 절절 맨다. 아무리 역사 왜곡이 일상인 나라라지만 이건 정말 아니다. 1961년 9월 8일 제주도 시찰에 나선 박정희는 도민 담화에서 뜬금없는 멘트를 던진다. “여러분은 잘 살 권리가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는 부정부패 일소니 공무원 기강 확립이니 같은 소리를 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잘 살 ‘권리’라니요. 수행원들은 대체 뭔 소리래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연설을 듣던 제주도민들은 그 말에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박정희는 좌익 경력이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10여 년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4·3은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금기어였고 박정희는 제주도민에게 에둘러 위로를 전할 수밖에 없었다. 애꿎은 민간인 희생자들에 대한 위로였지만 워낙에 험악한 세월인 데다 정적(政敵)들이 툭하면 박정희의 붉은색 전력(前歷)을 물고 늘어졌기 때문에 그마저도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박정희의 위로는 립 서비스로 끝나지 않았다. 이듬해 박정희의 지시로 이루어진 5·16 도로 착공은 제주도 경제에 화끈하게 불을 지폈다. 도로 개통으로 제주시에서 서귀포시로 갈 때 5시간이 걸리던 게 1시간 30분으로 줄었다. 2년 뒤인 1963년 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윤보선을 15만 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누른다. 제주도에서 쏟아져 나온 몰표 덕분이었다. 아픈 기억을 되살리는 대신 묵묵히 토닥여주는 박정희식 위로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보은이었다.

일러스트=이철원

1948년 4월의 제주도는 심지가 타들어가는 폭탄이었다. 4월 17일 진압 작전을 명령받은 국방경비대 김익렬 중령은 토벌 직전 반란군과 협상을 시도한다. 동족상잔을 확대하지 말고 대화로 풀어보자는 전단이 뿌려졌고 4월 28일 김익렬은 남로당 제주총책인 이승진(가명 김달삼)과 마주 앉는다. 이승진은 일본군 소위 출신으로 제주도 군사부장까지 겸직하고 있던 인물이다. 양측의 전투 행위 금지, 반란군의 무장 해제까지는 수월하게 대화가 진행됐다. 그러나 책임자 명단을 넘기라는 요구에서 이승진은 예민해진다. 결국 우리를 다 잡아 죽이겠다는 수작 아니냐. 김익렬은 자신은 직무상 반란군 책임자를 색출할 의무가 있으며 대신 자수하든 도망치든 그건 자유 의지에 맡기겠노라 약속한다.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는 이승진에게 김익렬은 자신의 아내와 6개월 된 아들을 인질로 내준다. 협상 내용을 듣고 길길이 날뛴 것이 미군정 경무부장이던 조병옥이다. 무조건 토벌을 주장하던 그는 협상을 엎어 버렸다. 김익렬 회고록에 따르면 둘 사이에 주먹질까지 오갔다고 하니 당시 험악했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조병옥이 핵심 인사였던 당이 지금 집권 여당의 뿌리격인 한국 민주당이다. 해마다 4·3 추념식 앞자리에 앉아 제주도의 한이라도 풀어준 듯 표정을 짓고 있는 그 당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궁금하다.

2013년 개봉한 영화 ‘지슬’은 난리를 피해 산속 동굴로 피난 온 사람들의 이야기다. 노모를 두고 온 게 마음에 걸렸던 아들은 어머니를 모시러 가지만 이미 토벌대에 집까지 불 타버린 후다. 아들은 어머니가 품고 있던 감자(지슬은 감자의 제주 방언)를 들고 와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어머니는 잘 계시냐는 말에 그렇다고 대답은 하지만 감자는 먹지 못한다. 그리고 그 감자는 동굴 사람들의 마지막 식사가 된다. 영화는 편향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토벌대 학살만 줄기차게 나오고 남로당 학살은 안 나오는 까닭이다. 반발, 이해는 한다. 그러나 보수 우파는 문화에 겨자씨 하나 심은 적이 없다. 그러니 투덜대지 말고 정 분하면 여러분도 만들어라. 못 하면 말을 마시고.

제주도 여행길에서 젊은 부부가 초등학생 아들에게 그 죽음의 기록을 참 성실하게 설명해주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이에게 분노를 심어주는 것을 그 부모들은 올바른 역사 교육이라 믿는 눈치였다. 그런 부모 안 만난 게 천운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역사와 위로라는 방식으로 만나야 옳고 맞는다. 코로나 때문에 그나마 바다 건너는 맛이 있는 제주도가 인기다. 모쪼록 역사를 가르친다며 일부러 찾아다니며 상처를 덧내는 ‘개념 있는’ 분들이 많지 않기를 바란다. 계속 건드리면 상처는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