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것은 권력의 정점에 오르려는 자 또는 사회적 유명 인사에게만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 일상에도 별의 순간은 찾아온다.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별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삶의 대전환이다.

/일러스트=이철원

나에게 별의 순간은 언제였을까. 청와대 청원 ‘시무 7조’로 43만의 동의를 이끌어낸 그때였을까. 아니면 논객이라는 칭호를 부여받고 유명 일간지에 기고문을 싣게 된 지금일까. 아니, 어느 쪽도 아니다. 내 별의 순간은 그보다 훨씬 전 일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의 이런 상황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글을 쓴다는 건 나에겐 큰 고통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예전의 나로 되돌아갈 것이다.

나는 별의 순간을 맞이하기 전, 누군가의 그 순간을 지켜보았다. 부산의 상고를 졸업하고 인권 변호사에서 변두리 정치인으로 우리에게 알려졌던 그는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있었고 온화한 미소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가난한 자를 대신해 모두가 잘살 수 있는 사회를 말했고 기득권과 가진 자에게 맞선 정의를 말했다. 그의 말은 아름다웠고 그의 세상은 찬란했다. 사람이 모여들었고 마음이 팽창했다. 별의 순간이었다. 이변과 격변을 거듭하던 그는 어느새 가장 크고 빛나는 별이 되어 있었다.

그가 별이 되었을 때, 나는 나 또한 별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빈자의 아들로서 부유층 자식들과 어울려야 했던 나는 강남 8학군이 낳은 반체제 인물이나 다름없었고, 머릿속은 온통 사회적 정의나 재벌 해체와 같은 말로 가득했다. 그런 나에게 그는 가난한 청년의 놀이터였고 비루한 영혼의 안식처였다. 가진 자들의 세상이 마침내 무너질 거라고, 질척거리는 세상의 정의가 마침내 견고해질 거라고, 차고 눅눅한 방바닥에 누워 나는 생각했다.

2년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군대를 전역하니 내 손에 쥐어진 건 조잡하게 코팅한 전역증이 전부였다. 군번과 소속, 계급에 얽매였던 시간은 나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다. 나는 변하지 않았고 세상 역시 변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가난은 그대로였다. 집은 여전히 서울 변두리의 임대 아파트에 있었고 부모님은 여전히 서민 신분이었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대기업 계열사에서 운전 일을 하며 월급을 받고 있었다.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던 건 다름 아닌 재벌의 돈이었다.

정의는 무너졌다. 2005년 10월, 경찰관 7명이 불에 타 숨진 부산 동의대 사태에 관한 뉴스가 흘러 나왔다. 학생운동 중 전경들을 감금하고 불에 태워 없앤 자들이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에 반발한 유족들의 헌법소원 청구에 헌재의 각하 결정이 내려졌다고 했다. 민주화의 불꽃은 사람의 뼈와 살을 태우며 만개했음을 알았다. 사상과 이념에 뒤틀린 정의가 붕괴하는 걸 보았다. 오열하는 유족들의 어깨가 티브이 화면 속에서 일렁였다. 구속된 학생들의 변호인 명단에서 익숙한 이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이름 석 자가 별처럼 빛나고 있었고 나는 눈을 감았다.

나에게 진실은 타인에게서 주어지는 것이 아닌, 내 안의 명료한 외침과 같아서 나는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정치라는 것과 결별했고 그것들이 제시하는 달콤한 말과 작별했다. 허황된 것들을 향한 시선을 멈추고 눈앞의 현실을 직시했을 때, 나는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었다. 몸을 일으킨 나는 골프장으로 향했다. 폐장 후 공 줍는 일을 할 사람이 급히 필요하다고 했다. 시급은 5000원이었다. 가난은 나의 몫이었다. 정치인의 몫이 아니었다. 정의도 나의 몫이었다. 세상에 바랄 게 아니었다.

별의 순간이 다가왔다. 낮에는 공부를 했고 밤에는 골프장에서 공을 주웠다. 어느 날 밤, 공을 줍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높이 솟은 가로등만이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빛을 머금은 비는 수천 개의 별이 되어 쏟아졌다. 내리던 비가 타닥타닥 어깨를 두드리며 속삭였다. 어이, 별의 순간이야. 나는 오도카니 서서 별들을 맞았다.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자, 별에 젖어 고꾸라졌다. 두 번째, 세 번째 시도에 겨우 담뱃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다음 해, 나는 그토록 바라던 한 회사의 입사 시험에 결국 합격한다. 세 번 도전에 걸친 결과였다.

어느덧 나이 마흔이 되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는 아이들과 볼을 비비며 인사한다. 아들 놈은 벌써부터 놀아달라고 난리다. 딸아이의 기저귀를 살핀다. 갈아야겠다.

집을 둘러본다. 온기는 충만하며 습도는 쾌적하다. 가난도 없다. 가진 자를 향한 분노도 없다. 이제 나는 나로서 견고하다.

요청받은 기고문의 주제를 나는 이렇게 정하기로 했다.

‘별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스쳐 가는 생각들을 써넣는 화이트보드엔 이 말이 선명하다. 그리고 어느샌가 그곳에 아내가 남겨놓은 말이 함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세상은 아직 그대로다. 가난한 자는 역시 가난하며 부유한 자는 언제나 부유하다. 정의마저 바래가는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글을 쓰는 것뿐이다. 골프장에서 공을 줍던 나는 골방에 틀어박혀 글을 줍는다.

아이들을 재우려는 아내가 침실로 들어갔다. 불이 꺼지고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또 다른 별의 순간을 기다린다. 그 순간은 내가 아닌, 내 아이들을 위한 것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