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나는 그림은 잘 모른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안경을 낄 정도로 눈이 안 좋아서 잘 보이지 않고, 뭔가 오래 보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한다. 그래도 기회가 날 때마다 전시회에 가려고 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문화인으로서의 최소한의 교양을 위해서다. 문화경제학 책을 쓸 때에도 그림은 뺐다. 형식적으로라도 내용을 채워 넣는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이렇게 그림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 숫자만 가지고 그림 시장의 규모, 재생산 구조, 정부 정책, 그런 얘기 하는 게 좀 어색해서 그랬다.
최근에 그림에 대해서 진지하게 다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그림 그리기를 워낙 좋아하는 초등학교 3학년 큰아이 때문이다. 잘 그리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하루에 한두 시간씩은 색연필 가지고 꼭꼭 그림을 그린다. 자기 전에도 그림을 그리고 잔다. 장모님은 몇 번의 개인전을 연 화가이시고, 아버지는 유명하지는 않아도 한때 한글 서예 작가이신 적이 있었다. 장모님 덕분에 따로 미술학원을 다니지는 않았지만, 교양 수준에서의 기초적인 그림을 좀 배우기는 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그림을 전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서울예고 같은 특목고에 가야 한단다. 그리고 거길 가기 위해서는 중학교 때 몇몇 전공학교에 가야 한단다. 거긴 어떻게 갑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시작하는 영재 교육에 가거나, 전문 학원에 다니기 시작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벌써 늦었다는 거다.
영재 교육으로 유명한 연주자들 책도 좀 찾아서 읽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에세이집도 이래저래 같이 읽었다. 음대 교수들은 강습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최고 수준의 연주자들이 전부 대학에 있으니까, 많은 돈을 들여도 최고 레슨을 받기 어렵고, 그래서 결국 조기 유학을 가게 된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아마 미술도 비슷할 것 같다.
경제학자로서 다른 예술과 달리, 화가는 화가 자신이 죽어야 작품이 제 가격을 받는 좀 특수한 시장이다. 슬프지만, 화가가 사라져야 더 이상의 공급이 멈춰지기 때문에 전체 컬렉션이 완성된다. 팬데믹 이후 미술 시장 현황을 살펴봤더니, 투자 상품으로서의 수익률은 미술 투자가 유가증권 투자보다 훨씬 안정된 수익률을 기록하기는 했다. 어느 정도 시장 가격이 형성된 5억원 이상의 작품들이 안정성과 수익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주력 상품이다. 인상파 화가들 작품이 여전히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는 것도 이런 조건들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보았다. 이런 이유로 아주 유명한 화가들의 유족들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지 못한 상황도 이해가 갔다. 먹고살기 힘든데, 뭐라도 팔아야 하는 시기를 지냈을 것이다.
피카소가 그림을 산업의 수준으로 올린 개척자인데,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세계적으로 경제가 좋았고, 유동성도 풍부했다. 앞으로도 그럴까? 내가 생각하는 미술 정책의 기본 방향은 죽고 난 뒤가 아니라 살아있을 때의 그림 활동이 행복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죽은 다음의 영광, 그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팬데믹 한가운데에 애들 여름방학을 맞았다. 그 사이에 화가 한 분을 만나서 큰애의 진로에 대해서 가벼운 상담을 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알게 됐다. 이게 돈도 돈이지만, 매주 학원에 데리고 가야 하는 일을 누군가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쉽지 않다. 어차피 대학 보내려면 그 정도 돈은 들어가니까 오히려 미술이 싸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거야 참.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전시회 포스터들이 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화가가 이렇게 어려운 길을 걸어서 겨우 한 명 탄생하는 거구나! 한국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것, 그것도 참 좁은 길은 좁은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