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다능인’(Multipotentialite)으로 여기는 나는 이런저런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며 즐거움을 느낀다. 최근에는 타운하우스 브랜딩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서 건축사 여럿과 ‘집’에 관해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한 건축사는 이렇게 말했다. “심플하지만, ‘예쁜 집’이 좋은 집 아닐까요?” ‘예쁘다’는 느낌이 주관적임을 감안할 때, 저마다 생각하는 예쁜 집의 모습은 다 다를 테다. 또 다른 건축사는 “모두가 다 다르게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건데 좋은 집이란 이런 거야, 그런 좋은 집에 살아야 해, 라고 정의하는 게 이상한 것 같아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건축사들 각자가 생각하는 ‘좋은 집’이란 어떤 모습인지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살고 싶은 집 모습 또한 그려보게 됐다.

/일러스트=김하경
/일러스트=김하경

그러고 보면 요즘 지인들과 가장 많이 나누는 대화 주제는 ‘집’이다. 누군가가 이사를 갔을 때만 하는 얘기는 아니다. 햇볕이 조금 부드러워지는 시간에 차를 마실 때에도 어느 누군가는 꼭 이런 질문을 던진다. “어떤 집에서 살고 싶어요?”

우리는 ‘구해줘 홈즈’ 같은 ‘집방’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월간 집’처럼 집에서 사는(live) 여자와 집을 사는(buy) 남자의 내 집 마련 로맨스를 그린 드라마를 보며, ‘건축탐구-집’처럼 집에 담긴 사연과 꿈을 풀어내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감상한다. 그러면서 각자가 그리는 ‘꿈의 집’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팬데믹 시대, 우리에게 집의 용도는 더 이상 거주에만 있지 않다. 집에 있는 시간은 나를 돌보는 시간이고 집을 소중히 여긴다는 건 곧 일상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다(심지어 지인 중에는 코로나19 이후 정리와 청소에 푹 빠진 사람이 많다. 하루에 세 시간씩 집 안 청소를 하고 나면 코로나19가 바꾼 삶의 변화에 놀라고, 그 변화가 불러온 풍경을 보며 뿌듯함을 느낀다고). 그렇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집’의 모습은 천편일률적이지 않다. 저마다 다른 모습의 ‘좋은 집’을 그린다. 모두가 다른 삶을 살고 있고 각자의 삶의 방향과 가치 역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인들이 현재 거주하는 집의 모습도 각양각색이다. 아파트와 빌라만 있는 게 아니다. 서울 근교의 전원주택에 살면서 다양한 취미 활동을 즐길 수 있도록 각 룸을 꾸며놓은 사람이 있고, 한옥의 정취를 사랑해 한옥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홈 가드닝의 매력에 빠진 지인 집에는 아예 온실이 있기도 하다. 그들 집에는 설렘이 있다. 고유한 빛깔로 채워 넣은 그들의 집은 역시 그들 각자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

이제 집은 더 이상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자아 정체성을 표현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일환이다. 내가 어떤 집에서 살지 결정하는 것은 나만의 공간을 나만의 방식으로 어떻게 가꿔 나갈지 그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남편을 잃고 차에서 살고 있는 영화 ‘노매드랜드’의 주인공은 자신은 “하우스리스(houseless)”이지 “홈리스(homeless)”는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집은 ‘하우스(house)’가 아닌 ‘홈(home)’이다. 결국 어떤 집에서 살고 싶으냐는 물음은 곧 어떤 삶을 살고 싶으냐는 질문과 같다. 요즘 나는 지인들과 늘 어떤 삶을 살고 싶으냐는 질문을 주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떤 집에서 살고 싶은지 다시금 생각해본다. 화려한 집보다는 역시 소박한 집이 좋다. 그 안에서 비우고 또 채우며 나만의 일상을 가꾸고 매만지고 싶다. 든든한 기둥이 있으면 더 좋겠다. 단단한 집이라면 우아한 삶도 꿈꿀 수 있을 테다.

집은 곧 나의 세계다. 그렇기에 나는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떤 집에서 살고 싶은가요?” 당신이 어떻게 삶을 꾸려가길 원하는지, 당신의 세계가, 나는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