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여성의 아름다움에 정통한 자라면, 아직은 앳되고 싱싱한 이 아름다움이 서른 살쯤에 조화를 잃어 펑퍼짐해지고 얼굴도 살이 쪄 축 처지고 눈과 이마 주위에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잔주름이 나타나고 얼굴빛은 윤기를 잃고 불그죽죽해질 것임을 정확히 예언할 수 있을 터. 이는 한마디로 말해서 찰나적인 아름다움, 바로 러시아의 여성에게서 그토록 자주 볼 수 있는 잠시 스쳐 지나갈 아름다움인 것이다.”

/일러스트=양진경

도스토옙스키 소설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이 대목에 이르러 ‘맞아, 맞아’ 무릎 칠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닐 듯하다. 혹 영화나 발레에 나올 법한 순백의 가냘픈 러시안 뷰티를 동경해온 남성분이라면, 실제로 마주친 우람하고 억센 ‘용사들’ 앞에서 당혹스러웠을지 모른다. 그들의 중성형 무게감에 압도된 채 어쩌면 이렇게 혼잣말했을 수도 있다. “그 많던 러시아 미녀는 다 어디 갔을까?”

러시아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모종의 환상은 19세기 러시아 문학과 혁명기 역사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부활’의 카추샤에서 ‘죄와 벌’의 소냐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문학 속 여주인공들은 일제강점기 남성 독자층의 큰 사랑을 받았다. 일명 ‘투르게네프적 여성’으로 통칭된 그녀들의 미덕은 강인하면서도 순종하는 여성성이었는데, 독립적인 동시에 자기희생적인 내조자 형상이야말로 드센 신여성과 답답한 구여성 사이에 낀 과도기 남성들에겐 최상의 대안으로 여겨졌다. 망명한 백계 러시아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타샤는 마우재(러시아인을 일컫는 방언), 쫓긴 이의 딸”이라고 시인 오장환이 읊었을 때, 그 여인의 미모는 기정값(디폴트)이었다. 서양과 동양이 뒤섞인 온순한 용모, 조신한 자태, 귀족 혈통의 품위(그렇게 상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식민지 조선인을 위로해줄 ‘나라 잃은 자의 슬픈 아름다움’. 그 맥락이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는 백석 시구의 필연적 아름다움을 탄생시켰다. 과연 다른 어떤 이름이 ‘나타샤’를 대체할 수 있단 말인가? 러시아 여성의 아름다움은 현실 토양에서 떨어져 나온, 짓밟히고 빼앗기고 소외된 자의 낭만적 이상향이었다.

그러나 혁명은 여성을 남성화했다. 계급 해방의 슬로건 아래 남성 동무와 팔짱 끼고 당당히 활보하던 소비에트 여성 동무는 강건했으며, 원기 왕성하고, 쾌활하고, 자유롭고, 심지어 곰처럼 거칠어 보인다는 평을 얻었다. 스탈린 집권 후에는 복고적 가치인 모성성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강철 같은 수퍼우먼이 소련 여자의 상징처럼 되어버렸다. 근래 유행하는 유튜브 ‘소련 여자’의 인기 포인트가 바로 그런 터프함이다.

성 해방을 성취한 평균적인 소련 여자는 20세 전후로 결혼해 12번의 중절 수술을 받고(유일한 피임법이었다), 아이 한 명을 낳고(그 이상은 힘들었다), 이혼 후에도 자식을 맡아 기르고(이혼이 아주 흔했다), 은퇴 후에는 또 자식의 집안과 손자를 돌봤다. 풍요롭지도 안락하지도 않던 사회에서 그것이 여성의 ‘권리’였다. 도스토옙스키가 진단한 조로(早老) 체질에 생산·재생산의 과부하가 걸린 그녀는 일찌감치 싱싱함을 잃어갔다. 잠깐의 처녀 시절과 가임기를 제외하면 사실상 중성이나 다름없었다. 소련 사회가 페미니즘에 냉소적이었던 이유다.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진 지 30년, 러시아의 일상은 서구 자본주의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여성의 몸과 성이 새삼스러워졌다. 상품화하기 시작했고, 계층화의 척도가 되었다는 말이다. 긴 금발, 푸른 눈의 늘씬한 아름다움이 러시안 뷰티의 등록 상표고, 서구적 세련미와 러시아적 전통미(알록달록한 농촌 스카프, 여우 털모자, 자작나무 배경, 그윽하고 청순한 눈길 등)의 조합은 러시안 뷰티의 이국성을 강조한다. 모델 같은 미녀는 성공한 남자의 최종 트로피다. 부유층 아내라면 바깥일을 하지 않으며, 설령 아이 서너 명을 출산한다 해도 잘 관리된 그녀의 여성성은 오래도록 유지될 테다.

여성의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는 맥락이 중요하다. 시대와 문화 조건에 따라 해석이 영 달라지기 때문이다. 여성성 담론 역시 문맥을 상실하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분쟁거리로 전락해버린다. 강제된 여성성(‘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을 향한 분노가 여성주의 이론의 멋진 출발점이긴 하나, 성숙한 여성주의라면 박탈된 여성성 혹은 거세된 여성성과 같은 변수에 대해서도 헤아려볼 것이다. 러시아 여성의 역사를 훑으며 생각하게 된다. 찰나적 아름다움을 통찰한 도스토옙스키의 진짜 관심은 눈에 보이는 한 꺼풀 너머 깊숙이 남아 지속될 또 다른 아름다움의 힘 아니었을까.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그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