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에겐 작물을 키우고 양봉을 하는, 텃밭이라 하기엔 크고 농장이라 부르기엔 작지만 가족의 자부심으로 농장이라 일컫기로 한 소박한 땅뙈기가 있다. 미숙하지만 우당탕퉁탕 시작한 이 주말농장도 꽤 이력이 쌓였다. 거기엔 두 마리 고양이가 산다. 처음 데려온 이유는 들끓는 쥐 때문이었다. 덫과 약을 놓아도 박멸되지 않는 쥐들은 창고와 농막을 갉아 먹고 수확물을 훔치며 배설물을 흩뿌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손바닥만 한 어린 고양이들을 안고 왔을 때, 어두운 구석에 숨던 연약한 모습이 생생하다. 삶은 생선으로 꼬시고 포근한 천과 자동 급식기까지 놓아 겨우 곁에 두게 되었을 무렵에도, 꺄옹꺄옹 울기만 하던 가냘픈 고양이들은 그저 귀여웠다.

그것으로 됐다, 무얼 더 바라리, 똥이나 잘 싸서 흙이라도 기름지게 만들어 다오, 여겼던 것인데 어느 날 어머니가 쥐를 잡았다며 보여줄 땐 놀라웠다. 풀때기 흔들면 달려들거나 띄엄띄엄 뛰는 메뚜기에 반응해 몸을 웅크린 채 궁둥이 씰룩대는 품이 어설프다 웃어 넘겼을 뿐이었는데, 제 몸만 한 쥐를 잡았다고? 고양이들이 포획물을 찢어 먹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되었을 때 날카롭게 번뜩이던 그 야성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그들이 사냥할 때의 태도는 서늘하리만치 진지하다. 가만히 목표물을 주시하는 순간의 집중력과 신중함은 경건할 정도로 고요하고 가차 없다.

그 이후 나는 고양이들이 간식 앞에 뒹굴면서 인간에게 빌붙어 연명하는 기회주의적 약자라는 생각을 절대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필요와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잡힌 쥐들을 볼 때마다 나야말로 과연 쓸모 있는 존재이긴 한지 깊이 반추한다. 나는 동물적인 감각과 인간만이 가진 특성으로 마땅히 하기로 한 것을 성취한 적 있는가. 고양이는 귀여운 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멋지고 고상하며 농장에서 의미를 지니는, 우리와 동등한 존재다. 우리는 그들을 묶어 놓지 않는다. 그들의 선택과 의지에 따라 이곳을 떠날지 몰라 우리는 좋은 대접을 해준다. 그러면 그들은 꼬리를 높이 세우고 무릎 위로 올라와 기꺼이 잠든다. 꿀 같은 다사로움이 품에 흘러 고인다.

채길우 시인·제약회사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