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위화의 소설 두 권을 선물받은 적이 있다. ‘허삼관 매혈기’와 ‘살아간다는 것’. 그때는 아직 소설 쓰기 전이었고, 작가가 되겠다는 꿈조차 꾸지 않던 때였다. 어느 날 ‘살아간다는 것’을 꺼내 읽기 시작했는데, 낮에 약국에 들른 외국인 환자의 얼굴이 위화를 많이 닮았던 게 그 이유였다.

그날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소설을 읽으며 하도 많이 울어 잠을 잘 수 없었다. 복귀라는 노인이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소설에선 그의 가족들이 거센 운명에 휩쓸려 모두 죽는다. 슬픔을 받아들이며 묵묵히 삶을 살아온 복귀는 마지막 장면에서 자기와 이름이 같은 늙은 소와 함께 서 있다.

책을 덮으며 위화를 원망했다. “아무리 작가라 해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다 죽일 수 있지? 정말 너무하잖아!” 그런 내게 누군가 말해줬다. “작가도 그러고 싶진 않았을 거야. 등장인물의 운명을 작가가 마음대로 정하는 게 아닐 테니까.” 그러나 위화에 대한 서운함이 가시지 않았다. 언젠가 만날 일이 있다면 어째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슬픈 운명으로 몰아갔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 인생은 모르는 것일까? 얼마 전 나는 정말로 위화를 만났다. 올해 서울 국제작가축제에 초청받았는데, 거기서 위화와 인사를 나눈 것이다. 개막식 이후 같은 버스를 탔고, 숙소 앞에서 같이 사진까지 찍었다. 통역을 통해 그의 소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열심히 이야기했지만 ‘살아간다는 것’의 복귀 노인에 대해선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젠 나도 소설을 쓰고, 그렇기에 작가가 등장인물의 운명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됐으니까. 모든 등장인물에겐 정해진 운명이 있고, 작가는 그것을 옮겨 적는 존재임을 깨닫게 됐으니까.

위화와 악수하고 헤어진 뒤 오랜만에 ‘살아간다는 것’을 다시 찾아 읽었다. 마지막 장면은 여전히 나를 울게 하지만, 동시에 어떤 문장들은 20년의 간격만큼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느꼈다. 예를 들면 소설책 말미 ‘작가의 말’에 실린 다음과 같은 문장들. “살아간다는 것[活着]이라는 말은 우리 중국말에서는 하나의 단어이며 힘이 넘치는 말이다. 그 힘은 절규에서 나오는 것도, 박차고 나아가는 데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내와 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