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옥 감독의 1969년 영화 ‘여성 상위 시대’는 여성 지위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을 끌어낸 계기가 된 작품이다. 당시 신문에 ‘여성은 남성 하위 시대를 창조했다’는 카피가 큼지막하게 실렸다. 실제론 남성 상위 영화였다. 신세대 주부가 모델 일로 돈을 벌어 사치를 부리다가 춤바람까지 났다. 그런 아내에게 남편이 이혼을 요구하자 여주인공이 단박에 기가 죽어 자살 소동을 벌인다. 스크린엔 훈계성 자막이 흘렀다. ‘여성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렇게 되기를 원하시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영화 밖은 더 노골적이었다. 그 시절 이화여대 앞에서 남자 대학생들이 피켓 시위를 벌였다. ‘다방과 제과점으로 향하는 그대들(중략), 귀부인과 같은 그 손가락으로 쌀을 씻어라.’ 지금이라면 글 쓴 남학생 손가락이 죄다 부러져도 할 말 없을 내용이다. 불과 반세기 전 커리어 우먼과 여대생을 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그랬다.
▶지금 30대 이하 여성은 남자에게 꿀릴 것 없이 자랐다. 대학 진학률만 봐도 2009년을 기점으로 남자를 앞질렀다. 취직 시험 성적만으로 뽑으면 여인 천하가 된다는 인사 담당자들 증언도 있다. IMF 이후 여자가 돈벌이에 나서면서부터 남성 상위 시대가 퇴조했다는 분석도 있다. 남녀 갈등도 이때부터 격화됐다. 된장녀, 김치녀 같은 여혐 신조어가 모두 2000년 이후 등장했다. 여성은 남자를 멸시하는 ‘한남’, 심지어 죽으라며 저주하는 뜻의 ‘재기해’, 극단적 남혐 사이트인 메갈리아 등으로 맞섰다.
▶여성가족부가 39세 이하 남녀를 대상으로 성평등 인식을 조사했더니 여성 74%가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불평등하다”고 답했다. 그런데 남성도 절반 넘게 “오히려 남자가 역차별당한다”고 반박했다. 이성 때문에 피해 본다는 인식이 20대 초반 남녀에게서 가장 높게 나타난 게 우려스럽다. 야당의 한 30대 정치인은 “남녀 갈등은 향후 우리 사회에서 가장 극심한 불안 요소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뛰는 집값, 줄어든 일자리는 서로 끌려도 모자랄 청춘 남녀를 눈 부라리게 한다.
▶우리만 이러는 것도 아니다. 며칠 전 영국에서 귀가하던 30대 여성이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납치 살해당하자 ‘강남역 사건’처럼 남녀가 서로 비난전을 벌이고 있다. 미국에선 오바마 행정부 시절 백악관이 전투 병과를 여성에게 개방했다가 찬반 논란을 빚었다. 해병대 사령관이 “군대엔 여성이 영원히 진출할 수 없는 영역도 있다”고 반발했다. 막상 해보니 남자도 나가떨어지는 훈련을 수료하고 여성 보병장교가 탄생했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 남녀 갈등도 줄어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