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재벌 그룹 중 하나이지만 여성의 경영 참여에 트인 문화를 보여왔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장녀 이인희 한솔 고문, 막내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은 아버지의 지지 속에 여성 기업인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생전에 이병철 회장은 이인희 고문을 가리켜 “사내로 태어났으면 그룹을 맡겼을 큰 재목”이라며 그의 능력과 포용력을 높이 샀고 해외의 중요한 사업 파트너를 만날 때마다 데리고 다녔다. 똑똑한 막내딸도 무척 아꼈다고 한다.
▶장자 승계 원칙이 강한 집안에서 야심 있는 딸들은 자신의 몫을 인정받기 위해 상당한 불협화음도 감수하곤 했다. 대성그룹 김수근 회장의 3남3녀 중 막내딸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은 대학 졸업하고 “시집가라”는 부모 희망을 물리치고 미국 유학을 떠나 집안의 지원도 끊겼다. 귀국 후 아버지 집무실 옆방에 책상 하나 놓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자신이 키운 브랜드 사업권을 놓고 큰오빠와 격렬한 다툼까지 벌였다. 결국 자신의 회사를 차렸다. 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1남2녀에게 지분을 엇비슷하게 나눠주고 두 딸도 경영에 적극 참여시키다가 갑자기 타계했다. 그 애매한 지분 구조가 화근이 돼 큰딸이 남동생의 경영권에 도전하면서 가족 간 반목이 커졌다.
▶최근 식품 대기업 아워홈에서 벌어진 ‘남매의 전쟁’이 재계에서 화제다. 세 자매가 의기투합해 ‘보복 운전’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고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오빠의 대표이사직을 박탈했다. 세 자매 가운데 일찍부터 아버지를 도와 회사를 키워온 막내 여동생 구지은씨를 대표이사로 선임했다.
▶아워홈은 구인회 LG 창업주의 셋째 아들(구자학)이 세웠다. 구자학 회장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둘째딸(이숙희)과 결혼해 1남3녀를 뒀다. 구 회장은 장남이자 외아들 대신 능력 있는 막내딸을 입사시켜 일을 가르쳤다. 막내딸 구지은 대표는 자신의 외가쪽 사촌자매인 삼성가의 이미경 CJ그룹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기업 여성 경영인이 될 것이란 기대까지 받았다. 하지만 연로한 아버지가 마음을 바꿔 외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기는 바람에 남매간 골이 깊어졌다.
▶능력 있는 여성들이 딸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감수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사람 보는 안목, 사업 키우는 안목이 탁월한 기업인도 기업 승계 문제에 직면하면 능력 있는 딸보다 무능한 아들로 기울어 분쟁을 만들곤 한다. ‘딸들의 반란’은 앞으로도 자주 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