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毛澤東)은 서예가로도 유명했다. 글자를 약간 기울여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그의 서체를 마오티(毛體)라 하는데, 최고 권력자의 글을 받으려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대학들은 교명을 받아 정문에 내걸었다. 거절당하면 마오의 글자를 채집해서라도 현판에 썼다. 칭화대(淸華大), 우한대(武漢大) 등 100여 곳에 이른다. 문화대혁명 재앙 후 한동안 외면당했는데, 마오처럼 절대 권력자가 되고 싶은 시진핑 주석이 이를 모방하면서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중국 포털에는 어떤 글씨든 마오티로 바꿔주는 프로그램까지 등장했다.
▶서체가 권력이 되는 또 다른 나라가 북한이다. 김씨 왕조의 태양서체(김일성), 백두산서체(김정일), 해발서체(김정일 어머니 김정숙)를 ‘백두산 3대장군 명필체’라 한다. 2018년 청와대를 방문한 김여정이 방명록에 남긴 글은 첫 자음을 비정상적으로 크게 쓰고, 글씨의 가로선을 오른쪽 45도 방향으로 기울였다. 필적 감정가들은 “타인 위에 군림하는 이의 내면을 드러내는 글씨체”라고 분석했다.
▶한국에서 권력이 된 서체는 문재인 대통령이 좋아한다는 신영복체일 것이다. 조정래 장편 ‘한강’의 표지, 손혜원 전 의원이 디자인한 소주 ‘처음처럼’, 문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 ‘사람이 먼저다’, 그가 청와대 비서관들에게 돌린 춘풍추상(春風秋霜) 액자 글씨가 모두 신영복 전 성공회대 교수의 서체다.
▶그런데 놀랍게도 국가정보원이 지난달 창설 60주년을 맞아 새로 공개한 원훈(院訓)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도 신영복체라고 한다. 신영복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1968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복역한 뒤 출소한 사람이다. 간첩 혐의를 받았다. 이런 사람의 글씨체를 간첩 잡는 국정원의 원훈으로 썼다니 이것도 ‘남북 이벤트'인가. 아예 국정원 간판을 내리는 것은 어떤가. 이번에는 경찰이 ‘가장 안전한 수도 치안, 존경과 사랑받는 서울 경찰’ 글씨체를 신영복체로 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경찰은 국정원으로부터 간첩 수사권을 넘겨받았다. 세상에 하고많은 글씨체를 놔두고 간첩 경력자의 글씨체를 다른 기관도 아닌 국정원과 경찰이 상징으로 삼나.
▶통혁당은 민주화와 상관없이 북한을 위해 암약했던 집단이다. 문 대통령은 통혁당 관련자들과 가깝거나 유독 챙긴다. 그러자 국정원과 경찰까지 신영복체를 쓴다. 여기에 국민 세금이 들어갔을 것이다. 부조리극(劇)은 자기모순적 속성과 그로 인한 정체성 혼란을 꼬집는 연극 장르다. 무대에서나 벌어질 일인데, 우리나라 정부에선 현실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