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훈 선수가 25일 일본 지바 마쿠하리 메세 A홀 경기장에서 열린 68kg이하급 남자태권도 동메달 결정전에서 패한 후 상대선수에게 인사하고 있다. 2021.07.25 지바=이태경 기자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빙상 1500m 은메달을 딴 한국 선수가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올림픽에서 금메달 딴 뒤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자 눈물을 흘린 선수도 있다. 과거 우리는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2등 한 ‘죄’로 사과하고 위로받는 게 당연한 나라였다. 미국의 한 심리학자가 2004년 아테네 대회에 출전한 유도 선수 84명의 표정을 관찰했다. 은메달을 따고 웃는 표정을 지은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 금메달과 비교하는 대조 효과가 은메달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한국은 금메달 집착이 유독 강한 나라였다. 결승에서 져 은메달을 목에 거느니 준결승에서 지고 3, 4위전에서 이겨 동메달 따는 게 낫다고 했다. 한국 언론이 금메달 숫자로 국가별 순위를 매기는 방식을 택한 영향도 컸다. 국가별 순위 집계는 비공식으로 하는 것이지만 한국은 여기에 목을 매고 국가적 시험을 보듯이 해왔다.

일러스트=김도원 화백

▶도쿄 올림픽에서 우리의 이런 관행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본다. 우리 태권도 선수단이 노 골드로 이번 대회를 마쳤다. 태권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고 처음 있는 일이지만 비난은 크지 않다. 많은 국민이 경기를 즐겼다. 석 달 전 수술한 왼발로 은빛 발차기를 한 이다빈과, 8번의 항암 치료와 재수술의 시련을 이겨내고 동메달을 목에 건 인교돈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동메달 결정전에서 패한 뒤 ‘엄지 척'으로 상대 선수를 축하한 이대훈에게는 “지고도 이겼다”고 격려했다. 은메달을 딴 여자 펜싱팀에도 격려와 응원이 쏟아졌다. 메달 획득에 실패한 수영 선수 황선우에게는 찬사가 이어진다.

▶단체전 금메달을 수확한 우리 남자 양궁 선수들은 시상식장에서 세리머니로 감동을 선사했다. 은·동을 차지한 대만·일본 선수들을 금메달 시상대에 불러 올려 함께 셀카를 찍었다. 무기를 내려놓고 축제로 화합하는 올림픽 정신이 그 사진 한 장에 녹아 있었다. 감동한 일본 사람들이 “시상대 위에서 승자 패자 구분은 의미가 없어졌다”며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돌렸다.

▶한국도 어느덧 메달 색 못지않게 선수들이 땀 흘려 이룬 성취를 소중히 여기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조선일보는 그제부터 국가별 금메달 순위와 함께 메달 합계 순위도 싣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란 어려운 여건을 딛고 감동적 인간 드라마를 쓰는 영웅들에게 메달 색깔이 전부일 수 없다. 스포츠는 그들의 열정과 환호, 역경과 엄숙한 패배를 함께하는 것이다. 우리도 스포츠를 스포츠로 즐길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