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영화 ‘국제시장’에서 6·25 흥남 철수 장면을 보다가 인간의 본성과 진심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역사책보다 영화임을 절감했다. 흥남 철수는 1950년 12월 북한 주민 10만명이 군함과 상선 190여 척을 타고 미군과 함께 흥남 지역을 탈출한 사건이다. 영화에선 아비규환 속에서 가족과 생이별하고, 배에 오르다가 추락해 바다에 빠져 죽는 장면이 이어졌다. ‘왜 이렇게 결사적으로 북한을 떠나려 했는가’란 의문이 떠올랐다. 김동리는 소설 ‘흥남철수’에서 북한 주민들이 그토록 절박하게 탈출하려 했던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그들은 모두 이 배를 타지 못하면 그대로 죽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미국 군사전문매체 디펜스원이 16일 아프가니스탄 카불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아프간인들을 태우고 카타르 알우데이드 공군기지까지 운항한 미 공군 C-17 수송기 내부 사진을 공개했다. /디펜스원

▶1975년 베트남 수도 사이공 함락 당시 그곳 주민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베트남 군경이 수용소에 갇히고, 공직자와 언론인은 인간 개조 학습소에 끌려갔다. 그걸 본 수많은 주민이 보트를 타고 탈출했다. 이른바 ‘보트 피플’이다. 해적을 만나고, 성폭행당하고 죽는 위험도 무릅썼다. 동·서독이 분리돼 있던 시절, 동독인들은 서독에 가려고 땅굴을 팠다. 베를린 장벽을 열기구를 타고 넘어간 가족에게 “어쩌려고 그런 무모한 시도를 했느냐”는 질문에 이 가족은 “무모한 게 아니라 간절했다”고 대답했다.

▶류승완 감독의 신작 영화 ‘모가디슈’는 1991년 내전이 발발한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모가디슈 국제공항엔 즉결 처형과 방화로 생지옥이 된 나라를 벗어나려는 각국 대사관 직원과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영화는 남북한 대사관의 탈출 실화인데도 “아프가니스탄 카불 탈출 사태가 떠오른다”는 감상평이 많았다.

일러스트=김도원 화백

▶탈레반이 아프칸 수도 카불을 점령하자 이슬람 근본주의 통치와 여성·아동 인권탄압에 치를 떠는 이들, 미군에 협력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된 이들이 앞다퉈 탈출하고 있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카불 국제공항을 이륙하는 비행기에 매달렸다가 하늘에서 추락하는 참혹한 모습이다. 말조차 잊게 된다.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 대군이 그리스에 쳐들어갔을 때,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끝까지 항전했다. 두 도시엔 적의 행군 속도보다 빨리 도망친 군인도, 군적에 이름을 올리고 월급만 타 먹는 가짜 군인도 없었다. 스파르타 결사대 300명은 적과 싸워 전멸하는 길을 택했다. 왕도 함께 전사했다. 아프간에 이런 지도자와 군인, 그들과 결의를 함께한 국민이 있었다면 지금 세계인이 보고 있는 카불의 필사 탈출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20년 만에 아프가니스탄 정권을 탈환하자 공포와 혼란에 빠진 수도 카불 시민들이 16일(현지시간)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카불을 떠나는 비행기를 타려고 트랩에 매달려 있다. 트위터 캡처